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2 (요 16:1-11)

첨부 1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마음은 우리보다 더 예수님이 곁에 계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가운데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란과 핍박이었습니다. 출회를 당하고 죽음에 넘겨지는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에 그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은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5, 6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삶에는 고난과 핍박이 가득하다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시며, 자신을 대신해서 성령께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죄’와 ‘의’와 ‘심판’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된 이유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참된 믿음의 자리로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 8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더 유익한 이유중 가장 유익한 것 세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것입니다.
성령님의 본질적인 사역의 핵심은 죄와 의와 심판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다른 기대를 합니다. 새영을 받고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위로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삶에 열매맺게 하시며,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먼저 일어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먼저 행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죄와, 의와 심판입니다. 우리는 은혜, 축복, 사랑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죄’, ‘의’, ‘심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죄와 의와 심판을 빼버리고 나면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약속하는 것과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도 축복을 약속합니다. 적절하게 투자하고, 지혜롭게 살면 그곳에도 성공과 형통함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건강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을 극복할 그날에 대한 약속도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세상이 할 수도 없고 가르쳐 주지도 않는 일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입니다.

성경 전체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다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세상은 관심도 없고 다루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와 의와 심판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쁘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성공과 편안한 삶과 이익에 있을뿐입니다.
세상도 죄를 말합니다. 경찰, 검찰, 법원 등 죄를 다루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죄의 결과를 다룰뿐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있어서 학교에서도 죄를 짓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지만 죄의 결과에 대해서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더욱이 심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이미 세상은 ‘심판’을 추방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과 지옥에 문제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나 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치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해서 죄를 지적하시고 의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전도를 할 때 축복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의에 대해서 말하고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면 싫어합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지 않은 자 앞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말씀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싫어합니다.

성경 읽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죄와 의에 대해서 말하며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 읽기를 거북해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전혀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이 많고 우리가 사람들을 용서하기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싫어합니다. 사랑에 대한 말은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힘들게 합니다. 결코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를 직시해야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보시듯이 우리가 죄를 보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가운데서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죄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정신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중 60%의 해당하는 사람은 병이 낳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중에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죄의 문제는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그것에 동의한다면 반감을 품게 마련입니다. 자기만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첫번째 반응은 감추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감춥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첫번째 반응은 하나님을 피해서 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핑계를 돌립니다.
그리고 요사이는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은 죄라고 표현하지 않고 치유받아야 하고, 상담받아야 하는 심리적인 장애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손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런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그런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죄라고 인정하면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심리적인 장애라고 한다면 우리는 위로받고 이해받는 전문적인 도움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 했든지 죄는 죄입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어도 죄입니다. 상대방이 너무나 악랄하게 굴어서 미워했어도 죄입니다. 서로 사랑했다는 이유로 부부관계가 아닌 남녀관계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면 세상은 이해해도 성경은 그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누군가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청문회와 특별검사제를 아무리 열어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보기는 힘이 듭니다.
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죄를 알아도 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회개는 없습니다.
의라는 개념이 요사이는 너무나 희박해졌습니다.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설명을 덧붙여야 합니다. 이미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름에 대해서 잃어버렸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이 올바른지 하나님께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만을 갖습니다.

의를 향한 목마름

성경은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기 위해서 초를 훔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지금만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의 기쁨과 이익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영원한 심판에는 관심이 없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뿐입니다. 죽고 난 다음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믿으십니까? 교회에 나와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으십시오. 천국과 지옥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일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과 지옥은 동화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을 보십시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뿐이지 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왜 믿지 않습니까?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20억의 사람이 지금도 예수님을 믿고 있고, 2천년간 그분을 믿어왔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도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가 치유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알콜중독자와 살인범이 변화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분은 우리에게 잘못이라고는 없으십니다.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은 우리안의 죄가 그분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까닭없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죄없다고 말해도 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을 1점 1획도 다 지킬 수 있다고 한다면 죄가 없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뿐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죄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의 본질을 아직 들여다 보지 않아서 죄를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나의 죄를 감당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죄의 뿌리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옳고, 예수님보다 더 옳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생각이 괜찮게 여겨지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은 다 선이라고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죄를 모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 바람에 하나님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모르는 이유는 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죄도 모릅니다. 정말 죄를 깨달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의를 사모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만이 청결함을 입을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에 대한 열망은 죄를 알고 의를 알았을 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저주받은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조차도 흔들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옳으셨으며 세상이 불의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진정한 축복이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죄인을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의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심판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예수를 믿지 않은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 세상 임금은 예수를 심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영원히 심판한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것이었습니다. 흠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단과 그 하수인들은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5절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범사가 잘되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 참된 축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전에 받았던 모든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저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지적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더 악해졌습니다. 의를 이야기 할 때는 예수님을 추방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이야기 할 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교회가 죄와 의와 심판을 이야기 할 때는 사람들은 통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하자 그들은 회개합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마음이 찔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회개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즐겁게 살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회개하면 되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가보지도 않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내 안에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이 와도 힘든 믿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않습니까?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지적이 와도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감각이 없는 것은 회개해야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기와 질투와 탐욕을 버리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죄악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나팔소리처럼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하나님게 달려 가십시오. 우리는 작은 죄 하나도 우리 안에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고 깨끗케 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 위에 있습니다. 거룩한 성령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데 위로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데도 평안을 주는 것은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후에 모든 축복가운데 인도해 주십니다.

핍박과 환난이 와도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확인된 사람은 담대합니다. 그의 앞에는 영원한 심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간과하고 그 위에 쌓는 번영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령이 사로잡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 먼저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령이 불처럼 임해서 개인과 공동체와 민족의 삶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민족이 거룩하고 경건한 민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희망을 가집시다. 성령이 죄와 의와 심판을 말씀하실 때 거부하지 마시고 회개하십시오. 그럴 때 성령님의 모든 축복과 위로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