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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0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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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 분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이 모든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율법이 뭐라고 말씀하는가를 따져보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인 출애굽기 2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사람이 누구에게 해를 받은 것이 있으면 더도 덜도 말고 똑같은 방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왼쪽 눈을 다치게 했으면 상대방의 왼쪽 눈을, 안쪽으로부터 세 번째 어금니를 다치게 했으면 역시 세 번째 어금니를 뽑으라는 것입니다. 당한 그대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대대로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기존의 율법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말씀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제 까짓 것이 뭐라고 감히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서 비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루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합니까?'

오늘날도 금식을 하는 분들이 있지만 금식이라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금식은 여러분들이 필요로 할 때에 조용히 할 것입니다. 금식한다고 광고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이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삽니다. 밥을 먹어야 힘을 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안 먹는다는 것은 내가 밥 먹고 힘을 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만큼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이어트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굳이 금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잠 잘 주무시고 하루 세끼 잘 드시고 열심히 일하시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오늘날은 금식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반드시 금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일년에 하루, 속죄일에는 모든 백성이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일부러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 날은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들이 일년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는 날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일년동안 지은 죄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일년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다 보니까 시간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정해서 금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좀 더 잘 믿어보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어떤 바리새인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나이다.' 기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는 것은 이틀동안 여섯 끼를 몽땅 굶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여섯 시에 아침을 먹고 저녁 여섯 시에 저녁을 먹습니다. 그러면 12시간동안 금식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점심을 한끼 굶는 것이 곧 하루를 금식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동안 점심을 굶으면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금식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이들이 하는 금식은 물 한 모금도 안 마시는 금식입니다. 요즘처럼 금식한다고 하면서 오렌지주스 마시고 당근주스 마시고, 링게르 꽃아 가면서 하는 금식이 아닙니다.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하는 금식입니다. 이렇게 보면 금식도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비가 생깁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왜 율법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우리 나라뿐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갑니다.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이루고 단 둘이서만 즐기러 가는 것입니다. 신혼여행 가는데 거창하게 가정의 미래를 계획하고 오겠다고 노트북 컴퓨터 들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입니다. 신혼여행은 놀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혼여행가서 싸우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심심해서 중간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 둘이서 3박 4일을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못견디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혼여행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일주일 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양가 친척들, 신랑 친구들, 신부 친구들, 다 초청해 놓고는 일주일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랑신부를 완전히 왕자와 공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쁜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고 좋은 말, 칭찬하는 말만 일주일동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이 기간동안에는 예쁘지 않은 신부를 보고 예쁘다고 해도 거짓말하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랑신부는 일생에 한번, 이 때에는 최고의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신랑과 친구들이 혼인잔치를 하는데 금식할 수가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마치 혼인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으로 인해 한껏 높이 들리움을 받는 이 시간에 금식이 웬말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리셨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해야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어떤 고정된 개념이나, 습관화된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그 분과 함께 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과 영광이 있어야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 것 같습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좀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옷도 꾀죄죄하게 입고, 넥타이는 십 년째 같은 넥타이를 매고 다니고, 어딘지 모르게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말을 해도 크게 하지 않고 조용조용히 하고, 늘 심각한 표정을 짓고 다니고, 성경책을 들고 다녀도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들고 다니고,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생활을 잔칫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늘 잔치하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쳐서 웃고 다니고 즐겁게 사는 것이 믿음생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늘 웃고 다니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뿐 아니라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만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잘 안되는 분은 오늘 집에 가셔서 자기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얼굴에 주름살이 가로로 그어진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로보다는 세로 주름살이 더 많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늘 인상을 쓰고 다니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교회에 가면 어른들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 분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 혹시나 실수할까봐 잔뜩 긴장을 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이 목사를 만났다고 어디 인사나 제대로 합니까? 붙잡아 놓고 '너 왜 인사 안하냐?' 고 야단을 쳐야 할 수 없이 꾸뻑하고 돌아서는 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세상이 변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공연히 목에 힘주고 인상쓰고 다녀도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웃고 다니시는 것이 훨씬 더 남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는 더더욱 웃고 다니셔야 합니다. 잘 웃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린 피로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왜 장례식에 온 사람들처럼 앉아있습니까?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500불 짜리 복권 맞은 것보다도 더 안 기뻐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매일 매일 주님을 만나 그 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정말로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 예수 믿는 기쁨, 이 비밀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될 것이요.' 말씀하셨습니다. 베는 처음에는 탄력이 있지만 오래 되면 점점 탄력을 잃어버리고 굳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낡은 베옷을 새 베조각으로 기우면 새 베조각이 탄력을 가지고 잡아당기기 때문에 결국에는 옷 자체가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그릇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잘 말려서 그것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물이나 포도주를 담곤 했습니다. 그런데 베와 마찬가지로 가죽은 오래되면 신축성을 잃어버립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립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발효가 될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어두면 점점 팽창하는 것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터져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낡은 가죽부대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정관념, 우리의 굳어져 버린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가 소속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여성 안수제도가 통과되어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이번에 선출된 권사후보들은 안수를 받게됩니다. 앞으로는 여성장로와 여성목사도 우리 교회에 나타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성안수제도가 통과되기 전까지는 이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남자목사의 부인은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만 여자목사의 남편은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사부님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총회에서 여성안수제도가 통과되는 그 날부터 찬성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제는 여성안수제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다 통과되었는데 이제 와서 반대하면 무엇합니까? 새 제도가 도입되었으니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게 싫으면 교단을 옮기던가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주가 새것으로 준비되었으면 부대를 새것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고정관념, 굳어진 습관, 굳어진 성격, 이런 것을 다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 앞에 침상에 들려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를 향해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시던가, 아니면 침을 놓아주시던가 지압을 해주시던가, 하여튼 뭘 해주시고 일어나라고 하셔야지 지금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보고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 같은 침상을 들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을 보십시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 말씀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중풍병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 포도주입니다. 아마 이런 포도주는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디에 가면 용한 의원이 있는데 거기에 가 보아라.', '무슨 약을 쓰면 고칠 수 있다던데 한번 구해서 써보아라.' 이런 포도주는 수도 없이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런 포도주는 처음입니다. 완전히 새 포도주입니다.

이 중풍병자의 마음에 순간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도 내 다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렇게 마음대로 떨리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 침상까지 들고 간단 말인가?' 낡은 가죽부대가 얼굴을 내미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중풍병자는 새 가죽부대를 꺼냈습니다. '그래, 예수님의 말씀이니 한번 믿어봐야지' 그리고는 다리를 뻗었습니다. 새 가죽부대의 입구를 여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습니다. 열려진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가 채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힘있게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가 함께 팽창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희열과 기쁨을 누려보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의 고정관념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굳어진 사고방식을 내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조상 대대로 진리라고 믿어온 것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이 한해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매 주일 새로운 말씀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굳어진 의식구조를 가지고는 그 말씀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새 포도주가 들어간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리듯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갈등과 번민만 더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새 가죽부대를 준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앞에 내 생각과 내 고집과 내 의지를 버리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놀라운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말씀이 살아서 내 삶을 주장하고 내 인생을 인도해 나가시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들의 고정관념과, 여러분의 상식과,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의심과 불신앙을 내어 던지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태양이라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새롭고 큰 가죽부대를 준비하여 새로운 축복, 큰 축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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