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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밝은 눈, 밝은 몸 (마 06: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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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눈, 밝은 몸(마태복음 6:22-24)

요즘에 와서 제 눈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눈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안경을 쓰지 않고 버텨왔는데, 이제는 점점 초점이 안 맞기 시작합니다. 안경을 쓰기는 써야겠는데 제 눈썹이 보시다시피 8시 20분으로 생겨서 제 얼굴에는 어떤 안경도 안 어울립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안경점이 보일 때마다 들어가 볼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멀리있는 것이 점점 잘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저 뒤에 앉아 계신 분이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잘 구분이 안 갔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구분이 갑니다.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누가 조는 것인지 주무시고 계시는 것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말씀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좋은 눈과 나쁜 눈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좋은 눈은 사랑이 담겨있는 눈이고, 나쁜 눈은 욕심이 담겨있는 눈입니다.
똑같은 대상이라도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는 것과 사랑이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는 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아름다울 것이 없는 사람인데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관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술람미는 포도원 지기였습니다. 하루종일 포도원을 지키느라 햇볕에 노출되어서 피부가 새까만 여인이었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는 미인도 아니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술람미를 가리켜서 백합화 같다고 말합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했습니다. 세상에 당신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솔로몬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신하들은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왕에게 감히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하여튼 속이 탔을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문둥병자와 귀신들린 사람까지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가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눈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쁜 눈은 욕심에 가득 찬 눈입니다. 사람의 눈에도 습관이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얼굴부터 보기 시작해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구두부터 보기 시작해서 점점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은 안 쳐다보고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손에 낀 반지라든가, 목걸이 같은 것에 시선을 맞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저를 쫓아왔습니다. 그러더니 살짝 웃으면서 종이를 한 장 주고 갔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보았더니 '당신도 날씬해질 수 있다' 이런 제목 밑에 살 빼기 전의 사진과 살 뺀 후의 사진이 나란히 박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은 안보고 배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잘 생겼든 못생겼든 상관없습니다. 배가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장삿속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쁜 눈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복점에 들어가서 바지를 입어보는 척 하다가 그대로 입고 도망을 쳤습니다. 주인이 '도둑이야'하면서 쫓아가는데 마침 지나가던 순경이 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권총을 뽑아들고는 도둑을 향해서 '거기 서라. 안 서면 쏜다' 외쳤습니다. 그런데도 도둑이 계속 도망을 가니까 순경이 총을 겨누었습니다. 상체를 쏘면 죽을지 모르니까 다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양복점 주인이 소리쳤습니다. '위를 쏘세요, 아래를 쏘면 바지에 구멍이 납니다' 이것이 욕심의 눈입니다.
욕심의 눈을 가지고 살면 그 인생이 너무도 불행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받지 못한 것만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게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내 가정과 내가 속해있는 직장,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의 삶, 이 모든 것이 너무도 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니'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눈을 가지고 살 때에 여러분의 인생도 밝아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좋은 눈은 초점이 분명한 눈이고, 나쁜 눈은 초점이 흐린 눈입니다.
초점이 분명하다는 것은 사물을 볼 때 단순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있었는데 날마다 새 옷을 입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지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였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옷감을 재단하고 바느질을 해서는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옷은 마음씨 나쁜 사람의 눈에는 안보입니다'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자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안 보인다고 하면 체면이 안 서니까 '그것 참 멋있다' 하면서 입고 나갔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백성들은 전부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 옷 참 멋있습니다. 지금까지 입으셨던 옷 중에 제일입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외쳤습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어린아이의 눈은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본대로 이야기하면 임금님이 뭐라고 할까', '마음씨가 나쁘면 안 보인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나쁘다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대로 단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눈은 초점이 맞지 않습니다. 하나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사업이 잘돼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럴 때 꼭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길 때 조심해야 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 그 다음에는 얼마나 나쁜 일을 주시려고 이렇게 좋은 일을 주셨습니까?'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맞습니다. 좋은 일을 주시면 감사함으로 받으시고, 어려운 일을 주시면 그것도 감사함으로 견뎌나가십시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한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잘 씁니다. '맞아, 그 사람 어쩐지 그렇게 생겼더라고' 그렇게 생긴 사람은 다 그렇더라는 선입견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에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생긴 것은 완전히 농사꾼처럼 생겼습니다. 한번은 비행기를 탔다가 영자신문을 달라고 했더니 승무원이 '아저씨는 이런 것 못 보셔요' 하더랍니다.
선입견 때문입니다. 이 선입견이 우리로 하여금 초점을 흐리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관상이 어떻다. 팔자가 세겠다, 영화배우 아무개를 닮았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중에 왜 만나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물어보면 자기도 모릅니다.
하나를 보면 하나를 보십시오. 하나를 보는데 여러 개가 보인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그냥 그 말 그대로 믿어주십시오.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나, 매일 내 욕을 하고 다니더니 오늘은 왜 칭찬을 하고 있나,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칭찬을 하거든 고맙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뒤통수를 치거든 그냥 맞으십시오. '그 사람 뒤통수치네' 그러고 허허 웃고 돌아서십시오. 예수님도 가롯유다에게 뒤통수 맞으셨고, 베드로에게도 뒤통수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하게 보셨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니' 말씀했습니다. 복잡하게 보는 사람은 그 인생이 피곤합니다. 염려와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보는 사람은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 인생이 밝아집니다.

세 번째로, 좋은 눈은 멀리 볼 수 있는 눈이고, 나쁜 눈은 먼 것을 보지 못하는 눈입니다.
멀리 본다는 것은 목표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피곤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에 있을 때 100km 행군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완전군장을 꾸려 가지고 100km를 24시간 내에 주파하는 것입니다. 50분 걷고 10분을 쉬는데 이때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 하나있습니다. 군화를 벗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을 치료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치료를 하는가 하면 바늘에 실을 꿰어 가지고 물집을 관통한 다음 실을 그대로 살 속에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속에 담겨있던 물이 실을 타고 밖으로 빠져 나옵니다. 전혀 아프지 않고 물집을 없앨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100km를 다 걷고 나면 나중에 발바닥이 온통 실 투성이가 됩니다.
이렇게 힘든 행군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목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군을 마치고 마지막 골인할 때에 '드디어 해냈다' 하는 그 기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않고 발바닥에 물집이 몇 개 잡혔느냐, 앞으로 남은 고개가 몇 개냐,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견디기가 힘듭니다. 가까운 것을 보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먼 것을 볼 수 있으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왜 결혼하셨습니까? 결혼을 위해 결혼했다고 생각하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서로 좋아서 같이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큰 목표를 향해서 서로 힘을 합쳐 나가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가정의 목표가 없으면 작은 것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당신은 연애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더니 이게 뭐냐, 옆집 아무개는 이번 결혼기념일에 식당을 통째로 빌려서 축하파티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뭐냐'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식당 아니라 컨벤션센터를 통째로 빌려서 파티를 한다 해도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나쳐 가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가지고 남들과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서로 힘을 합쳐서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표를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로 힘을 합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로 한 목표를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서로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가정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그들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었습니다. 가나안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지금 조금 배고프고 목이 말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 채소가 먹고 싶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면 오늘의 삶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찰 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그리고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삶이 어지러워집니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집착하게 되고 결국은 사는 것이 피곤해 집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니' 말씀했습니다. 멀리 목표를 내다보는 사람이 밝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좋은 눈은 영적인 것을 보는 눈이고 나쁜 눈을 육적인 것만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물질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주부가 남편이 출근하는데 붙잡고 잔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쌀도 다 떨어졌고, 아이들 등록금도 내야하고, 어머니 병원에 가신다는데 병원비도 있어야 하고, 며칠 후에는 동생 결혼식이 있는데 옷도 한 벌 새로 사 입어야 하고 ' 하면서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남편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냥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오?'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돈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까지가 여러분의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쓴 것만큼만 내 것입니다. 요즘에 정주영씨 삼 부자가 또 우리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재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루에 네 끼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보았습니다. 음식이 아무리 쌓여있어도 내가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통장에 돈이 가득 있어도 내가 쓴 돈만 내 돈입니다. 나머지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먹고 다른 사람이 쓸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어도 베풀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많아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돈이 사람을 쫓아다니지 사람이 돈을 쫓아다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물질을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먹고 살만큼만 주십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너무 세상 물질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말씀대로 재물을 너무 사랑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 주실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육신의 건강보다는 내 영혼이 건강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함보다는 내 영혼이 얼마나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보다는 내 생명이 다하는 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의 말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것이 영적인 눈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눈, 세상에서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을 상을 바라보는 눈, 이것이 영적인 눈입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니' 말씀했습니다. 이 영적인 눈을 뜨고 사는 사람은 그 인생을 기쁨으로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매일 매일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십니까? 사랑이 담겨있는 눈, 초점이 분명한 단순한 눈, 멀리 있는 목표를 내다보는 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함으로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밝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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