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 (눅 15:1-7)

첨부 1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누가복음 15:1-7)

영국 런던에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 아이오와 주에 있는 교회 신도들이 이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원의 안내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찬란한 역사와 더불어 이 사원에서 얼마나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배출되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보십시오'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신도가 나서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참 훌륭한 사원입니다.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원이군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 질문에 안내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 홍콩동신교회가 자랑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콩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역사입니다. 또한 어느 교회보다 많은 교인들이 출석하고 있고 귀한 일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콩에 있는 한인 교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교회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채로운 행사들을 펼쳐왔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그런 일들을 잘 감당해 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교회가 자랑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정말로 자랑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 교회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다가 '바리새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 나쁜 놈들' 이러면서 상당히 흥분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이렇게 세 가지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바리새파는 약 6천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율법을 지키는 열심으로 인해 모든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바쳤습니다. 때가 되면 주머니를 털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도 했습니다. 나쁜 짓도 안하고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았습니다. 여러분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과 경건한 삶을 여러분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하얀 회로 칠을 해서 깨끗해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더러운 것과 시체가 썩는 냄새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욕을 먹었습니까? 상갓집에 가서 실컷 울다가 나중에 '그런데 하나 물어봅시다. 도대체 누가 죽은거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기는 했는데 왜 섬겨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왜 열심히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형식은 있는데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에 이런 논란이 있습니다. 찬양예배를 몇 시에 시작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전부 저녁시간에 찬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오후 2시나 3시에 찬양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옛날과 달리 교인들이 점점 교회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두 번 나오는 것이 어려워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기다렸다가 찬양예배까지 드리고 가라고 당긴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찬양예배를 저녁시간에 드리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 좋은 대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을 가지고 서로 정죄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녁예배를 고집하는 어떤 분은 찬양예배를 당겨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편하자고 예배시간을 제멋대로 바꾸는 법이 어디있느냐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찬양예배는 저녁 때 드려야 한다고 성경 어디에 써있습니까? 예배시간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새벽 5시든, 밤 12시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것입니다. 형식 때문에 내용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형식을 지키느라고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들만 잘 믿을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도 믿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과 드릴 수 없는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멸시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구해내야 할 임무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고 멀리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4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을 잃어버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사람을 양에다 비유합니까? 오늘 본문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사람을 양으로 비유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양으로 비유한 이유는 사람하고 양이 너무도 닮은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은 나가 놀더라도 때가 되면 집을 찾아옵니다. 우리 사람도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어도 일단 집을 찾아 온 다음에야 필름이 끊깁니다. 어떤 동물이든지 방향 감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로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 중에도 유난히 방향감각이 없는 분은 가만히 보면 다 양같이 순한 분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자기가 가는 길을 분명하게 알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모두들 양과 같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양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어떤 동물이든지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가 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있던가, 발톱이 있던가, 하다못해 지독한 방귀를 뀌어서 자기를 보호하는 동물도 있고, 정 무기가 없으면 몸의 색깔을 바꾸어서라도 자기를 보호합니다. 그런데 양은 대책이 없습니다. 누가 공격해 오면 그냥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병균이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겨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두려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이 언제나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를 떠나 광야를 헤매고 있는 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그 잃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양이 아니라 바로 그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서는 것입니다. 만약 100마리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어디 가서 한 마리를 더 사오거나 아니면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아무 양이나 하나 붙잡아다가 숫자를 채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난리가 났는데 누가 와서 '뭘 그런 일을 가지고 난리를 떠십니까? 고아원에 가면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 데려오면 되지 뭘 그러세요' 했다고 해봅시다. '아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하시겠습니까? 아마 상당히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목자들이 양에게 이름을 지어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처럼 목자들은 양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3절에 보면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아무 양이나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바로 그 양을 이름을 부르면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난 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애타게 찾으십니다. 이사야서 49장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새겼겠습니까? 이름을 새기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 석자, 그 이름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로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동족을 배반하고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자라는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거기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이렇게 부르지 아니하시고 '삭개오야'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 바로 나를 찾기 위해서 내 이름을 부르시며 애타게 찾아다니시는 분입니다. 본문 4절은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말씀했습니다. 대충 찾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찾아다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찾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나 스스로가 나를 지킬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있습니까? 길을 잃어버린 양같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외로움에 싸여있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을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건져주시고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어깨'라는 단어는 복수로 쓰여졌습니다. '양쪽 어깨' 라는 말입니다. 목자의 어깨 위에 누워있는 양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동안의 굶주림과 두려움, 여기저기 상처 입은 몸을 목자의 어깨 위에 의지하여 잠들어있는 양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신다면 여러분도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들, 육신적인 고통과 마음속의 번민들, 괴로움과 두려움을 이 시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과 새로운 소망으로 부어주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6절, 7절을 봅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사실은 누가 더 기뻐해야 합니까? 목자가 더 기쁩니까? 양이 더 기쁩니까? 사실은 양이 더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한 것은 양이 아니라 목자였습니다.
사실 양은 자기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있는가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잘 압니다. 광야를 혼자 헤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목자는 잘 압니다. 그래서 양보다 목자가 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죄악의 길을 방황하는 인생이요, 결국은 멸망으로 끝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인생의 최고 가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한 영혼을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