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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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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음성. '엄마, 잘 자.' '그래, 은빈이두 잘 자.' '엄마, 우리 꿈속에서 만나.' '그래, 꿈속에서 만나자.' '엄마, 오늘밤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꼭 가져오는 거지?' '그럼, 꼭 주실 거야.'

이불 속에서 한 마디씩 하는 세 아이에게 일일이 대꾸해 주며, 나는 이불장에서 솜이불 한 채를 더 내려 그것을 길게 접어 아이들의 머리맡에 담을 쌓듯이 둘러 주었다. 외풍이 워낙 심해 방바닥은 따끈따끈해도 코가 시렸다.

전등을 꺼 주고 거실로 나왔다. 쪽마루를 깐 세 평 정도의 좁은 마루 구석에 놓은 연탄 난로의 쇠뚜껑이 벌겋게 달아 있었고, 그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는 물 끓는 소리와 함께 김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거실 안이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마당으로 통하는 유리 낀 미닫이가 바람에 심하게 덜그럭대고 있었다. 금호동 산중턱에 자리잡은 집이라 겨울 내내 세찬 바람에 시달려야 한다.

난로가로 다가서서 불을 쬐며 손을 올려 머릴 위의 형광등 스위치 줄을 잡아 당겨 거실의 불도 껐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게 요즘 버릇이 되어 버렸다.

불을 켜 놓은 안방의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에서 조명되는 빛만으로도 거실은 충분히 밝았다. 그 불 밝은 안방에서 '여보, 추운데 뭐하고 있어? 빨리 들어와.' 하는 남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난 잠깐 가슴이 벅찼다.

그러는 다음 순간 그 음성을 이젠 영원히 들을 수 없다는 현실로 돌아오자 뜨거운 울음 덩어리가 되어 터져 버렸다. 아직 잠들지 않았을 아이들에게 울음소리가 들릴까?  난 두 손으로 입을 싸 덮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애들 방 연탄을 갈아야지. 그러고 나서 어저께 사다가 감춰 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내어 아이들의 머리맡에 놓아줘야지.'

유리문을 열고 마당의 어둠 속으로 내려서자 희끗희끗한 것들이 세찬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눈…. 가슴이 더욱 싸늘해지며 '공원 묘지에도 눈이 내리고 있겠구나'.

눈에 보이는 듯 선하여 이 차가운 땅 속에 혼자 누워 있을 남편에 대한 연민이 또 울음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연탄불을 갈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아까 분명히 불을 껐는데, 아이들 중 하나가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느라고 불을 켰나? '아직 안 자니?… 누가 마루에 불 켰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때 문득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소파 앞의 탁자 위에 커다랗고 흰 봉투가 놓여 있는 것이다. 확실한 기억은 없었지만 아까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하, 아이들이 엄마한테 슬쩍 주는 크리스마스 카드인 모양이다.

난 봉투를 집어 방으로 들어가다가 몸이 굳어졌다. 겉봉에 분명히 남편 글씨로 '사랑하는 아내에게'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투를 뜯으니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편지의 글씨는 남편 글씨가 아니었다. 그 점에 관해서 남편은 편지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었다.

'내가 지금 글을 쓸 힘이 없어서 간호원에게 받아쓰게 하오. 무엇보다도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여자는 당신뿐이라는 거요. 고마운 당신, 그리고 가엾은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난 정말 죽기가 싫소.

돌이켜 보면 잠시 한때라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준 적이 없었던 것같아 마음이 아프오. 어서 나아서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라는 간호원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이 크리스마스라고 신나게 지내 본 기억은 전혀 없구려.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허둥대던 기억밖에는….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소. 내가 죽고 나면 당신과 아이들의 고생이 어떠할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아 심히 괴롭소. 하지만 여보, 나는 항상 당신과 아이들을 보고 있겠소.

당신과 아이들의 얘기를 나는 항상 듣고 있겠소. 여보,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오. 하나님의 돌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오. 이 사실을 믿고 죽으니 나는 행복하오. 당신도 너무 슬퍼하지 마오. 변함없는 내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을 대신하리다.'

편지를 읽다 말고, 난 아이들 방으로 달려가서 불을 켜며 외치듯 물었다. '누가 이 편지 갖다 놨니?' 큰딸이 이불 밖으로 눈물 자욱 있는 얼굴을 내밀며 대답했다. '내가. …아빠가 병원에 있을 때, 크리스마스 날 엄마 주라고 나한테 맡겼어.'

'그랬구나….' '엄마, 울지마. 언젠가는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댔잖아.' '그래, 그래.'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마루로 나온 나는 편지를 가슴에 안은 채 문득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 행복한 미소를 하늘로 띄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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