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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바다같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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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남편과 나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동거하며 아이를 낳았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우리는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어느새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 그런데 둘째 딸을 낳은 뒤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달리기 시작했고, 2년 사이에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친정이나 시댁도 없어 남편 혼자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컸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면서 아내 병 수발에 아이들까지 돌보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짜증내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나를 보살펴 주었다.

어느 날은 통증을 호소하는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음박질했는데, 난 남편의 등에 업혀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도 남편이 울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선아, 이대로 네가 못 일어나면 내가 죄를 짓는다. 어서 일어나야 우리 결혼식도 올리고 아이들 크는 것도 보지. 우리 약속했잖아.”

첫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 자식은 절대 부모 없는 아이들로 만들지 말자고 약속했던 것이다. 3년 동안 누워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핏덩어리였던 둘째 딸아이가 벌써 세 살이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편의 웃는 모습과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했다. 남편의 약속대로 간단하게 결혼식도 올리고 우리는 정식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이었다. 긴 투병생활에 쇠약해져 임파선 결핵이란 합병증을 얻은 것이다.

뼈에 통증이 심하고 오른손에 신경 장애가 와서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수술하기 하루 전날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고모 댁에 맡기러 갔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먼길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 가는데, 복잡한 버스 안에서 등에 업힌 딸아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딸아이의 팔을 얼마나 잡아 당겼는지 아이의 팔이 그만 빠지고 말았다. 나는 딸아이가 울며 보채는데 영문도 모른 채 계속 달래기만 했으니….

내가 수술을 받자 남편은 또다시 병원에서 새우잠을 자고 출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끼니도 챙겨 먹지 못하고 다니는 그이에게 나는 철없이 굴었다. 병원 밥을 먹지 못하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때로는 다른 환자들이 생선회를 먹는 모습을 보고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빈손이 부끄러워 밤늦게 찾아와서는 사과 몇 알을 내 머리맡에 슬그머니 놓고 가곤 했다. 그렇게 가슴아픈 병원생활을 끝내고 퇴원하는 날 고모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는 끼고 있던 금반지를 판 돈으로 병원비를 내주셨다.

병원 짐과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니 집앞에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11월 초겨울이라 꽤 쌀쌀했지만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단칸방은 싸늘한 냉방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깔아놓은 이불 위에는 2백 밀리 우유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그 우유를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 때문에 돈이라고는 씨가 말라 버린 남편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2년이 흘러 나의 병이 재발했고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 즈음 남편이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남편이 내게 쏟았던 정성 못지않게 나는 남편의 병간호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피곤한 탓인지 약을 지어먹어도 감기 증세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남편이 하도 성화를 해서 나는 폐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렇게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폐종양이라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는 엄마 노릇, 아내 노릇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인지….

나는 당분간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고 유명하다는 암 센터를 찾아가 정밀 검사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하면 완치 가능하니 당장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도 곧 척추 수술을 받아야 하는 현실 앞에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나는 남편에게 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할 면목이 없었다.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그이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애써 눈물을 삭이면서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선아, 그 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니? 울지 마라. 이번에도 다 잘될 거야.”며칠 뒤 남편이 수술을 받고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자 이번엔 내 차례였다.

남편을 병실에 혼자 놔두고 문을 나서는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다음날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폐를 절단해 내는 수술을 받았다.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남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발을 짚은 채. 또 눈물이 흘렀다. 남편은 얼마나 아프냐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한 손으로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오로지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픔을 견뎠다.

지금도 6개월에 한 번씩 건강 검진을 받으러 다니는 나는 밤이면 몸이 쑤시고 고통스럽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순간마다 자상한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들이 내 곁에 있어 주었기에 지난 18년 동안 용기를 잃지 않으며 견뎌 낼 수 있었다.

바다와 같은 넓은 가슴으로 부족한 나를 늘 품어 준 남편이 고맙기만 하고, 건강하게 자라 준 아이들이 한없이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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