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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느 남편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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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물든 저녁 무렵, 아내는 아이들과 목욕을 갔고 나는 철 지난 잡지책을 뒤적이다 무심코 아내의 일기장인가 낙서장인가 아무튼 아내의 마음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며칠 전 일어난 일들이 깨알같이 나열돼 있었고 나는 코끝이 찡하는 전율을 느끼며 한자한자 읽어내려갔습니다.

당신 옷꼴이 그게 뭐야.

몇 해를 입고 입어 올이 피고 탈색이 되어 형편없이 늘어져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아내에게 내가 무심코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만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건네주며 옷 하나 사입구료하고 출근했었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평상시와 같이 생활한 겁니다.

그런데 그 말에 아내는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나도 멋부리면 그래도 괜찮은 여자라구요… 누가 멋부리기 싫어서 그러나, 그까짓 오만원 가지고 무슨 옷을 사입어… 백화점에도 안 가보셨나, 동그라미가 몇 개 씩이나 붙어 있나….하면서 나에 대한 넋두리를 적쟎이 토해 적어 놓았더군요.

나는 조금 흥분된 마음으로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내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 내가 준 돈을 가지고 백화점을 향해 아파트 입구를 나서려는데 정문 입구에 시끌시끌한 소리와 함께 많은 엄마들이 모여 있어 무언가 하는 호기심으로 내다보니, 작은 트럭 위에 가마니 가득 붉은 고추들이 쌓여 있더랍니다.

그것을 본 아내는 발길을 멈추고 잠시 허둥대던 기분을 가라앉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금방 알뜰 주부로 되돌아가 그 돈으로 붉은 고추를 한 웅큼 쥐고 아저씨 이것 얼마에요?하고 물은 다음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과 싱싱하고 상큼한 상추 한 단을 사고 나니 금방 부자가 되고 행복한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조나단이 좋아서 그저 겨울 바다에만 취한 채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로 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영원히 순백한 마음으로 살자던 나의 아내가 어느새 이렇듯 생존의 노예가 되었나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서글펐고 한편으로는 고마와 새삼 성실한 남편, 건강한 남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서둘러 저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아내는 뜻밖의 내 봉사에 의아해 하면서도 큰 눈망울 속에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았습니다. 나는 살며시 당신 옷 안 사입었어? 하고 물었더니,

내 몰골이 아무리 흉해도 당신은 나를 믿고 사랑하고 나 또한 당신을 믿고 사랑하니 값비싼 밍크 코트가 무슨 소용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순간에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보다 더 행복한 남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문득 밤하늘을 쳐다보니 맑게 갠 하늘에서 별들이 알알이 부서지고, 나는 이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녀를 포근히 껴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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