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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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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술에 얽힌 이야기는 적지 않습니다.
당대에 의인이었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평가되었던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함을 입어 방주를 만들었고 모든 육체를 가진 생명체가 생명을 잃는 엄청난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끝난 후 농사를 짓다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누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함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흉을 보았는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가리워드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이었던 노아가 자식들 앞에서 벌거벗고 누웠던 사건은 술 때문이었습니다.
 
탈무드에도 술에 관련된 이야기 특히 술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포도 나무을 심고 있었다. 악마가 와서 '무엇을 심고 있소.'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나무라고 대답하였다. 악마는 또 '포도나무는 어떤 나무요?'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매우 달면서도 새콤한 맛이 있소. 그리고 이것을 발효시키면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술이 된다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악마는 그렇게도 좋은 것이라면 자기도 거들고 싶다고 하였다.
악마는 양과 사자, 돼지, 원숭이를 데리고 와서 그것들을 죽여 그 피로 거름을 했다. 그 때문에 노아가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양처럼 순해지고, 좀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와지고, 더 마시면 돼지처럼 추악해지고, 더욱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소란을 피우게 되었다.
하나님이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던 노아까지도 이런 상태가 되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는 일이 아닙니까?
 
빨리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성격을 지닌 우리 민족은 폭탄주라는 것을 개발하여 즐길 뿐만 아니라 아주 엄청난 양의 술을 소비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큰 사고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 음주 운전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술에 관련된 이야기 중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말씀과 함께 이어서 물으신 내용입니다.
이때 주님이 하신 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잔은 크게 3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진노,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마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보냄을 인함이라'(렘 25:15-16)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시련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보편화된 일로 죄가 의심나는 사람이 있으면 물이나 술을 가득 채운 잔을 강물에 띄우는데 그 잔이 물이 빠지면 죄가 있는 것으로, 잔이 물이 빠지지 않으면 죄가 없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이스라엘에도 그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민5장에 보면 어떤 여인이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으로 의심이 될 때 여인의 유, 무죄를 가리는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구원을 뜻하였습니다.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노래하였습니다. 또한 시편 116:13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찬양하는 내용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내 두 아들, 주님을 따라 다니는 두 아들을 좀더 높은 자리에 앉게 해 주시되 하나는 오른 편에 ,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던 요청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표출이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그 일이 있고 난 후 제자들 사이에 그 두 제자에 대한 분히 여기는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제자들도 자신이 오른편에, 아니면 왼편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성 그 자체를 나쁘다고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은 것이 본성입니다. 그러나 먹어서는 될 것이 있고, 먹어서는 안될 것이 있으며 또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계실 때 곧 주님은 곧 고난과 수치와 죽음의 잔을 앞두고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영광과 자랑의 잔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받은 그 잔을 어떤 의미로 받으셨습니까? 고난과 괴로움은 주님이 받으시고 나는 영광과 찬양, 칭찬과 기쁨만을 받으시려는 마음으로 받으신 것은 아닙니까?
 
오늘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 현장에는 3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기뻐하는 사람입니다.:이제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로마의 정권으로부터,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고 펴며 심지어는 자신의 옷을 길에 깔아 왕으로, 해방자로 역사하실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꺼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내어쫓으며 기적을 행함으로 민중들에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칭송을 받더니만 이제는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젊은 예수, 개혁자 예수를 기쁘게 생각할 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제거할 생각을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관심의 사람들입니다. 지난 목요일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거의 절반에 가까운 유권자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먹고사는데, 아니면 즐기고 노는데 바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던 말던 자신의 생각대로, 습관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강원도에 산불이 나던 말던 자신들이 놀러가기로 했다면 놀러 가는 것이요, 구제역으로 교통이 통제되면 지나는 길이 막혔음을 답답하게 여길 뿐 다른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주일, 곧 종려주일입니다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기뻐하였는데 그 환호가 진정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고 기뻐하는 환호였을까요?
혹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제자들처럼 서로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을 기대하고 있고,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되어지길 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입성을 기뻐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주님의 입성을 마치 사육제를 맞는 마음으로 마시고 즐기자는 생각으로 기뻐하고 환호하였던 것은 아닐까요?
 
서양에서는 사육제가 있습니다.
남미, 그 중에서도 브라질의 사육제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브라질 사람들 중에는 사육제 기간을 위해 한 해 동안 준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브라질의 경우 사육제는 2주간 동안 계속되는데 그 사육제는 사순절을 앞두고 시작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던져 줍니다. 사육제는 사순절 기간동안 금식을 비롯한 금욕적인 생활, 경건 생활이 강조되기 때문에 그 전에 실컷 먹고 마시자는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되었답니다. 이 기간동안 발생되는 수많은 범죄 사건들. 타락, 폭력, 방화, 약탈 심지어 살인까지 벌어지는 예를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육제는 사순절이 낳은 사회적인 악영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이 한 주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나아가시는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자 하는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곧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찬을 받으셨습니다.
받아먹은 것은 작은 떡이요, 받아 마신 것은 한 모금도 되지 않는 작은 포도주입니다. 사육제를 즐기려는 마음으로 받기에는 너무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 주시려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기에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워지는 것이요, 성찬을 통하여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입성을 환호하되 우리의 죄가 사하여 지고 허물이 벗겨질 것을 기뻐하는 구속의 은혜를 기뻐하고 환호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언제까지나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내 자신을 내어 줌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너희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진정으로 남을 높이며,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촉구였습니다.
너희가 이 잔, 곧 고난의 잔, 십자가의 잔, 희생의 잔, 봉사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한 입의 양식을 위해, 한 모금의 마실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응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2-2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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