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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고난 (막 15: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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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장 찬송 속에도 보면 예수님은 크게 고민과 고통을 당하는데 사랑 받던 제자들은 그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 주간을 맞이하고 고난 주일을 맞이하면서 참 주님의 그 고통스러우심과 십자가의 고난을 연상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여러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연상하시면서 들으셔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제목입니다.
리차드 맥킨(R. M. Macheyne) 박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모든 육신 부분의 고난 이였다고 했습니다. 가시관에 찔린 고통, 갈대와 채찍에 맞은 고통, 십자가에 못 박힌 고통. 이것은 육신 부분의 아픔이었다고 했습니다. 또 치욕의 고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음을 당한 것,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 것, 심지어 주님이 옷을 벗김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치욕의 고통도 주님이 당했습니다. 또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고난입니다. 종교의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로부터 치욕을 당하시고 정치인들인 왕과 장로들로부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군인들과 관원들로부터 고난을 받으셨고, 일반 민중으로부터도 고난을 받으셨고, 심지어 강도로부터 치욕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한 고난을 당한 분입니다. 그냥 고난을 당하신 분이 아니라 철저하게 고난을 당한 분이라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공산세계에서 福音때문에 14년 간이나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고생했던 렘브렌트 목사님은 자신이 14년 간 당한 고난을 두고 복음의 직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한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14년 동안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고생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도 예수님 직분 때문에 당하신 고난입니다. 첫째는, 선지자 직분 때문에 당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야! 네가 선지자라 하니 너를 치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은 대선지자 신데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또 제사장 직분 때문에 당하셨습니다. '남을 구하데 너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 예수님 자신이 구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직분 때문에 또 고난을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왕의 직분 때문에 당하였는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냐?'하면서 조롱을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대선지자요, 대제사장이시요, 만왕의 왕으로서 직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심중한가를 살펴볼 수 있는데 복음서의 총 89장 가운데 25장, 4분의 1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기사로 실려져 있습니다. 복음서의 중요한 사건이 274건이 있는데 그 중에 91건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건으로 나와 있습니다. 떠 91건의 고난 기사 중에서 64건은 고난 주간에 된 사건입니다. 단 고난 주간 몇 일 사이에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64건의 고난 가운데 금요일 하루에 당하신 고난이 24건이나 됩니다. 그 중 가장 무서운 고난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절정적인 고통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고난 주일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 전에 너무나 육신적으로 너무 핍절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밤새껏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그 날 밤에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시 눈을 붙일 수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벌써 겟세마네 동산에서 초죽음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잡히신 때부터 조롱과 채찍을 맞아야 했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셔야 했고, 밤도 새벽도 없이 날치기 재판을 당하는 등, 조금도 잠을 잘 여유를 그들이 주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이 너무 핍절해서 초죽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십자가 처형의 아픔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 틀을 직접 지고 갈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원래는 죄수로 하여금 가로지르는 나무만 지고 가도록 하고, 세로로 세우는 나무는 미리 갔다 놓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나무로 십자가를 만든 완전한 십자가 틀을 바로 지고 가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에 얼마나 괴로우셨기에 여러 수 차례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갈 정도로 주님은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고통을 다소 못 느끼게 하는 약물인 약용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으시고 그대로 다 고통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죄수들에게 이 십자가 처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약용 포도주를 마시게 해서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잠시 잊도록 해주는 것이 통례였는데, 예수님은 절대로 그것을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께 십자가 못을 박고 세워 놓을 때 끈으로 팔을 묶어주거나 엉덩이를 붙혀 놓을 수 있는 '세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세들을 달아 주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전연 팔을 묶어주거나 엉덩이를 받쳐주는 세들을 부착해 주지 않고 그대로 두 손, 두 발을 못박고 그대로 처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알포드(Alford) 목사는 '끈도 없고 새들도 없는 십자가에 달린 6시간의 고통은 처참한 것 이였다.' 그것도 한 시간도 견디기 어려운데 6시간을 장장 그 십자가에 달려 있었으니 그 고통이야말로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님도 너무 괴로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고난 주일에 설교하기가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설교가 없는 예배를 드렸는데 1시간 동안 온 교인과 함께 찬송과 기도로 무릎을 꿇고 울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런 고난의 주님을 앞에 두고 우리가 편안히 앉아서, 그리고 설교하는 우리 자신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진정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릴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그 괴로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와 같은 고통스런 십자가의 고난을 왜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두 가지를 살피면,
첫째는,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들의 죄악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이유를 밝히기를 인간의 허물 때문이요, 인간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상함은 허물 때문이요, 죄악 때문이라. 여기 인간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물이라. 바로 우리의 허물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허물과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에 주님은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을 대충 3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7:21-23에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입니다. 음란, 도적질, 살인, 탐욕, 악독, 속임, 교만, 훼방. 이런 죄악들이 우리 마음에서 생겨나는 죄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1:28-31에 하나님을 저버린 결과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불의와 추악과 악의와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증오와 거역이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린 결과에서 나오는 죄가 불의와 시기와 비방과 증오와 거역입니다. 이런 죄악을 우리가 범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타락에서 나오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16종의 죄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죄악들은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서, 타락에서 나오는, 인간의 이 죄악들 때문에 주님이 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1절을 보면 이런 죄악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그랬고, 사도행전 10장 42절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우리가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불법자로서 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 아니하고, 대신 주님이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철저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무서운 죄악을, 이 죄악의 심각성을 지금 고발하시는 장면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전과 7범의 죄수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는데 자기의 죄악이 너무나 중대함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자기는 그 죄가 그렇게 큰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자기 죄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수난 주일에 믿는 죄수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성극을 하는데, 이 때 이분이 그리스도 역을 맡았습니다. 절정적인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을 박히는 장면에 자기 자신도 두 손에 못을 박아 달라고 했습니다. 직접 박아달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성극에서 두 손에다 못을 박아달라고 하기에 갑자기 망치를 찾고 굵은 못을 찾아와서 죄수들이 모두 관람하고 있는데 거기서 진짜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두 손바닥에다 말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든지 이 죄수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내 죄 때문에 이렇게 아픈 십자가를 받으셨습니까?' 너무나 아팠습니다. 구경하는 죄수들도 그 순간 몸을 떨고 눈을 가리웠습니다. 10분만에 그 장면을 끝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친히 두 손, 두 발에 못을 박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을 바로 주님이 당하시면서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오늘 나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오늘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 하나님을 저버린 데서 나오는 죄악, 타락에서 나오는 죄악, 이 죄악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진정 고발하고 우리에게 심각성을 던져주고 있는 이 십자가를 한번 생각해 보셔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이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표시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을 박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마치 광야에 모세가 높은 장대에 뱀을 단 것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요한 일서 3장 1절에도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4장 10절에도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사랑하사!' 그래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그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이유에서도 얼마나 당신이 우리를 사랑했는가하면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시면서 자신을 두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친구를 위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구원받는 백성을 위해서,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그랬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고 그랬습니다. 이 사랑입니다. 이태리에 가면 세바시야 여사의 순교비가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자기 남편으로부터 예수 믿는다고 하여 칼에 맞아 죽은 순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16군데나 남편의 칼에서 상처를 입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칼로서 아내를 찌를 때마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여보, 당신의 칼 잡은 손이 당신을 다치지 않도록 하세요! 당신이 칼로서 내 몸에 상처를 입힐지라도 당신의 몸에는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세요.' 결국 16군데나 찔러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남편의 폭력 앞에 사랑을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이여!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이 사랑의 십자가가 내 눈 앞에 있는데, 이 사랑의 고통이 내 눈앞에 있는데,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어찌 사랑하지 못하겠느냐 말이지요. 한 소자를 어찌 잃을 것이며, 한 소자를 어찌 실족시킬 것이며, 한 소자를 어찌 멸시하고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용서해 주며, 우리도 이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깊이 생각하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십자가의 사랑을 드러내어야 할 줄 믿습니다.

 (2006-02-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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