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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눅 0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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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죽은 사람을 살리신 적이 세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경우이고, 또 한번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번은 바로 이 나인이라는 동네에 사는 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지요.

1. 엘리야와 과부

물론 성경에는 그 외에도 죽은 사람이 살게 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것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는 아합왕에게 앞으로 몇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지금말로 하자면 정치범이 된 거지요. 그래서 산속 어느 시냇가에 숨어서 까마귀들이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얼마동안 살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니까 시냇물이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사르밧이라는 동네로 가서 어떤 여자에게 무작정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아들 하나가 있는 과부였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한 끼 빵을 만들어 먹을 밀가루와 기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식사를 한 다음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참이었지요. 엘리야는 그 마지막 식사를 자기를 달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비를 내리실 때까지 통의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과부네 가족은 가뭄 속에서도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엘리야도 편안히 숨어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과부의 아들이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희망이 끊어지는 것이요, 살아야 할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인데요, 제가 살던 동네의 한 아주머니의 아들이 월남에 갔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과부였고, 다른 식구들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들은 외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그래도 이 아주머니는 아들이 월남에서 보내오는 것들 때문에 상당히 여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월남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아주머니가 온 동네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통곡을 했습니다.

엘리야로서는 이 과부의 슬픈 처지를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범으로 수배된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숨겨주는데, 그 집 외아들이 죽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자기 다락방에 그 죽은 아이를 갖다놓고 하나님께 죽기살기로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 얼굴을 봐서라도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내가 이 집에 숨어지내면서 돈도 안내고 홈스테이 하는데, 왜 하필 이 집 아이를 죽이십니까? 다른 집 아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의 생명을 돌려주셨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아이를 안고 다락방에서 내려와 그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줍니다. '당신의 아들이 살아났소.' 엘리야의 체면이 좀 세워졌겠지요? 그 어머니가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시고, 당신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신 것을 이제 내가 알겠습니다.'

2. 엘리야와 예수님

엘리야는 구약에서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선지자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지금 예수님을 엘리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처럼 예수께서도 과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엘리야가 살아난 아들을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살아난 이 청년을 그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큰 선지자는 누구였습니까? 엘리야였어요. 지금 누가는 예수님을 엘리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지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지요.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일입니다. 또 선지자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예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는 일이지요.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 선포된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예수께서 선지자로 오셨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선포된 약속을 이루시려고 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그렇게 하신 것은 선지자 누구누구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우선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백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엘리야를 다시 보내겠다고 하셨거든요. 결국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거지요. 그리고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졌고, 그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신 메시야는 엘리야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누가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다시 13절을 보세요. 계속해서 '예수께서'라는 호칭을 사용하던 누가가 갑자기 '주께서'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라는 호칭은 신앙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거든요. 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방법과 예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방법을 비교하면 금방 드러나지요. 엘리야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주여,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그만 죽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엘리야가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그 주께서 지금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는 엘리야 같은 선지자급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오셨다는 것을 누가는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과 과부

누가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여자들을 배려하신 기록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여자들을 배려하신 것은 그 사회가 여자들이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도구로 취급당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상도 여자요, 차기 수상으로 유력시되는 야당 총재도 여자요, 오클랜드 시장도 여자인 이 뉴질랜드와는 상황이 아주 다른 사회였단 말입니다. 옛날 유교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고, 아녀자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조선시대의 우리나라에 오셨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백정, 머슴... 이런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서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며 그 발에 동백기름을 붓는 기생들을 흔히 볼 수가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여자들이 소외되고 무시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불쌍한 여자는 누구겠습니까? 모든 권력과 부가 남자들에게 집중되는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의 보호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의지할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이 과부들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던 것은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과부일 망정 그래도 아들이 있다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아들은 남자이고, 이 아들이 어머니를 보호하고 부양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법은 여자가 과부가 될지언정 최소한 아들은 하나 가질 수 있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아들을 낳기 전에 남편이 죽어버리면, 그 남편의 동생이 형수에게 아들을 낳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동생의 의무였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하나 낳으면 죽은 남편의 대도 잇고 이 과부도 아들을 바라보고 살 수가 있겠지요.

어쨌든 과부에게는 유일한 희망이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면 그 과부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요. 죽은 아들의 시신을 뒤따라오는 과부를 예수님이 만나셨습니다. 13절 보세요. 주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그 어머니가 얼마나 슬피 울었겠어요? 온 동네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울던 그 어머니처럼 울지 않았겠어요? 그 과부의 아들을 빼앗아간 죽음, 이 가련한 여인의 인생을 잔인하게 짓밟고 있는 이 죽음에 대한 분노가 예수님의 얼굴에 서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자기 백성을 유린하고 이처럼 고통과 슬픔 가운데로 몰아가는 이 원수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그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젊은이를 다시 살리셔서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아들을 돌려받음으로써 이 과부는 그나마 그 사회에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간직한 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예수님이 가장 먼저 만나주실 사람은 누구일까요? 교황입니까? 총회장일까요? 예수님이 자기 친구로 삼으실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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