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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피리를 불어라 (눅 0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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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힐리어 속담에 'Kidole kimoja hakivunji kiroboti.'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손가락 하나로는 벼룩을 죽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속담으로 하자면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혹은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말에 해당될지 모르겠군요. 장터에서 함께 어울려 노는 아이들이 사이가 서로 틀어져서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쪽에서 피리를 불면 다른 쪽에서는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놀이를 해 왔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저쪽에서는 못들은 체하고 꼼짝도 안 하는 것입니다. 또 한쪽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하면 저쪽에서도 함께 엉엉 우는 소리를 내야 할 것인데, 이제는 아무리 애곡을 해도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놀이가 성립되겠어요? 저쪽에서도 춤을 춰주어야 신이 나서 더 피리를 불 것인데 못들은 척하고 있으니 힘이 빠져서 피리를 불 수가 없지요.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으니 애곡하는 사람은 쑥스러워서라도 더 이상 곡소리를 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비난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사람들에게 회계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선포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고 그 표시로 세례를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순간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생각에 회개할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설령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해도 사람들 앞에서 늘 거룩하고 경건한 체함으로써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까지는 좋은데 잘못하면 자기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추세로 간다면 이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될 지경입니다. 지금까지 누려오던 종교적 지도자의 위치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관리하고 그것을 해석해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선지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과거에는 이들이 모든 종교적 행사나 활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자기들을 떠나서 요한에게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권세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기입니까?

이 위기를 타개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요한을 비난하고 매도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을 흠잡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선지자였습니다. 약대털옷을 입었다고 했지요? 이것은 선지자의 복장입니다.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서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광야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은 마땅히 존경받고 칭송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서 요한의 금욕적인 삶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흑색선전의 전형적인 모습 아닙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흑색선전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민단체들의 감시활동이 활발해져서 부정부패한 사람이나 무능력한 사람에 대한 낙선운동까지 벌이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터무니없는 흑색선전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희망 섞인 추측을 해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흑색선전만큼 비겁하고 추악한 것도 없습니다. 평소에는 점잖은 분들이 선거철만 되면 어떻게 비겁하고 철면피가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선거철이 아니라도 정치판에서 가장 익숙한 것이 야당의 흑색선전과 여당의 잡아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의 인기관리와 권력유지를 위해서 흑색선전이라는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어떻게 모든 백성이 존경하고 나아가서 세례를 받는 그런 선지자를 가리켜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몰아부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또 하나의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보다 더 인기가 많고 더 능력이 있는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 역시 그들의 권력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도 완전히 매장을 시켜야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선지자 역시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을 만큼 흠잡아 비난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금식하고 광야에서 칩거했던 요한과 달리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고 누구나와 잘 어울리고 그들의 식사에 초대받아 가곤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는 귀신들렸다는 흑색선전이 통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궁리 끝에 내놓은 비난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먹보, 술꾼이라는 얘기지요. 거기다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세리나 죄인과 한 부류의 건달이라는 의미겠지요.

이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미덕을 가진 선지자가 왔어도 그 미덕을 꼬투리 잡아 비난하는 흑색선전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비난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어떠한 미덕이라도 그것을 비난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가령 이웃을 잘 도와주는 사람 같으면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망나니라고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 아끼고 아껴서 저축을 많이 한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구두쇠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격려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잘하지 못한 부분이나 형편없는 것을 가지고도 격려하고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현주소입니다. 세례요한은 다가오는 새 시대를 선포하러 왔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던 구시대, 구제도를 마감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새로운 시대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고 계셨습니다.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나라가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새로운 질서가 싫었습니다. 아직도 자기들의 권력을 보장해 주는 그 옛날의 질서가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에 반항하고 그것을 뿌리뽑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폐지되고 없어져야 할 과거의 질서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질서와 그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모두가 나와서 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새로운 질서를 환영해야 할 것인데, 마치 장터에서 어떤 아이들이 피리소리를 듣고도 들은 시늉도 하지 않고 춤추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 놀이에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풀고 계시는 이 놀이마당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방해놓을 궁리만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의 말솜씨는 정말 알아주어야 합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로 바리새인들의 결정적인 실수들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동시에, 자신의 섭섭한 심정을 또한 감추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가져온 구원을 거부하고 그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밉고 섭섭하겠어요?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상당히 공감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다른 때 이 말씀을 읽을 때보다 훨씬 수긍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제가 섭섭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와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한번 완독해 봅시다 하고 모든 교인들이 함께 동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경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지금 몇 분이나 여기에 맞춰서 성경을 읽고 계십니까? 제가 손바닥을 내밀면 여러분이 탁 쳐야 소리가 날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니까 허공이 내민 제 손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또 우리가 교회를 재정비하는 의미에서 멤버십 제도를 강화하고 새로 교회를 세우는 기분과 각오로 각자 멤버십 신청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몇 분이나 작성해 주셨습니까? 목사가 피리를 불면 여러분이 장단을 맞춰주어야 신이 나서 놀이가 계속될 것 아닙니까? 목사 혼자 나가서 피리를 불고 있는 모양새가 여러분 보기에 좋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장단을 안 맞춰준다고 피리 부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장단을 맞추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피리를 불 거예요. 그 피리 소리가 시끄러워서라도 장단을 맞춰 춤을 출 때까지 계속해서 피리를 불 것입니다. '춤추기 싫은데 왜 자꾸 피리를 부는 거야? 좀 지나면 피리소리가 그치겠지. 그때까지만 참고 견디자' 하고 생각하시는 분은 큰 오산입니다. 피리로 안되면 나팔을 가지고 와서 불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왼쪽을 향해 노를 젓고 다른 사람은 오른쪽을 향해 노를 젓는다면 그 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사랑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주사랑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자동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감이 떨어져 내 입으로 쏙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희생도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우선 여러분에게 피리소리에 맞추어 장단맞추는 정신을 요구합니다. 우리 모두의 헌신과 인내로 말미암아 올해에는 우리 교회가 새롭게 정비되고 크게 부흥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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