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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예수를 몰라!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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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반역과 배신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람이 두 명 이상 모인 곳에는 어디나 배신의 가능성도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언제는 죽고 못산다고 서로 사랑하던 남녀가 배신과 증오와 원한의 관계로 치닫는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좀더 복잡해지고 거기다 권력이나 재물이 매개가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음모와 술수가 생겨나고 되고, 반역과 배신이 뒤따르게 됩니다. 성경에도 많은 반역과 배신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비록 갈릴리 촌구석에서 고기잡이하던 사람이었지만, 나름대로 뚝심과 의리도 있었고, 그래서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 맏형 노릇을 했습니다. 나이가 가장 많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도 수제자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배우고 깨달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베드로의 이름이 무려 101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양육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대표입니다. 대표가 갖는 상징성이 있지 않아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의 고백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들 역시 베드로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위치와 상징성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베드로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세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배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배신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는 아주 다른 것이지요. 믿음을 저버렸다는 뜻에서 배신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수제자로서 기대되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즉 예수께서 갖고 계시는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배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신이라고 하면, 자기편을 이탈해서 다른 편으로 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편으로 항복하고 간 것은 아닙니다. 영어로 말한다면 가룟 유다의 행위는 betrayal이고 베드로의 행위는 denial입니다. denial도 넓은 의미에서 배신이 될 수 있지만, 가룟 유다의 배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어쨌든 예수님의 수제자, 가장 믿었던 베드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께서는 동료 제자의 배신에 의해 붙잡혀 와서 지금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책임감도 있고, 또 주님이 걱정되기도 해서 몰래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한 여종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머, 이 아저씨도 저 잡혀온 사람과 한 패인 것 같은데...' 그 말에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요? '무슨 소리 하고 있어? 이 여자가 생사람 잡네.' 그리고는 얼른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또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더니 '이 아저씨, 저 예수 따라다니던 사람 아니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놀라서 '아니야, 난 저 사람 알지도 못해. 오늘 첨 봤어.'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에는 여자 형사들이 쫙 깔렸나? 여자들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지. 하고 남자들 틈에 끼어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이번에는 남자들이 베드로 말하는 것을 보더니 이구동성으로, '이것 봐, 당신, 저 예수랑 한 패지? 당신 갈릴리 사투리 쓰는 걸 보니 분명해.' 하는 것입니다. 야, 오늘 잘못 걸렸구나. 베드로가 정색을 하면서 말합니다. '아니라니까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저 예수 제자라면 지금 당장 하늘에서 벼락을 맞을 거요.' 갈 데까지 가버렸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하고 고백하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맹세하던 그 수제자는 어디를 가고 '내가 저 예수 제자라면 벼락을 맞을 거요.' 이런 비겁하고 초라한 인간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까?

한번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의 베드로는 못난이, 팔푼이다. 수제자입네, 용감하네 하면서 앞장서던 것은 그 용기는 다 어디 갔다는 말인가? 다른 때의 모습은 놔두고라도, 지금 이 현장의 베드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아, 나는 베드로를 이해할 수 있어. 얼마나 두려웠으면 사랑하는 주님을 모른다고까지 했을까? 그렇지만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잖아? 또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그것은 베드로가 이제부터 주님과 관계를 끊겠다고 한 것은 아니잖아? 다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님께 죄송한 말을 했을 뿐이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갈릴레이가 지구는 돌고 있다고 말한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돌고 있다니, 너 그 말 취소하지 않으면 당장 화형에 처하겠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죽기가 싫어서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죄가 되어 풀려났습니다. 그렇게 나오면서 갈릴레이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그렇지요. 갈릴레이가 지구가 돌고 있다고 말해도 지구는 돌고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이제 지구는 돌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은 변할 수가 업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요. 알아도 너무 잘 알지요.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 했다고 해서 몰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어서 모른다고 한 것도 아니에요. 다만 갈릴레이처럼 그 순간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시 모른다고 했을 뿐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처한 상황은 우리가 여기 앉아서 마음 편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그런 한가한 형편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대역죄인으로 잡혀왔습니다. 그러니 그 제자라면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에요. 아까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했던 일이 있습니다. 51절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싸웠단 말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휘두르는 칼에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날아갔어요. 귀가 잘렸다니까 큰 부상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큰 칼로 귀만 살짝 자를 수 있겠어요? 어쩌면 베드로는 그 사람의 머리를 내리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칼이 안 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물 던지던 실력으로 칼을 휘둘러 빗나갔는지, 귀만 날아간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살벌하고 위험한 전투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와 있는 곳은 바로 그 대제사장의 집이에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아까 귀를 잘린 종은 아직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지 모르지요.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 중 하나가 겁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벌써 쫙 퍼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아까 그 칼잡이였다는 것이 들통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순간이에요. '이 여자가 생사람 잡네!'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으면 벌써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저 예수의 제자이면 당장 벼락을 맞을 거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베드로를 향해서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아니야, 그래도 나는 돌을 던지겠어 하시는 분 있습니까?

그러나 던져야 해요. 베드로는 돌을 맞아야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밖에 나가서 심해 통곡했어요. 새벽이 되면 그놈의 닭은 왜 울어야 하는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데 말이지요. 그 닭 울음소리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 그 닭 울음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몇 번 더 주님을 부인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한 짓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호랑이 굴속에서 덜덜 떨고만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닭 울음소리가 베드로를 살렸습니다. 자기가 한 짓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어요. 죽지 않으려고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 정말 잘못이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은 것입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고 동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어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의 신앙을 부르짖었지 않아요? 신사참배 안 하면 붙잡혀가서 죽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겉으로 형식적으로 신사참배하고 속으로 진실한 믿음을 가지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나 믿음이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 죽음과 진리를 바꾸는 것, 이것이 진리에 거하는 것이고, 진리 편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폴리캅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피신했다가 그 죽음과 맞서기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한 번만 선언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뭐, 상황이 그렇고, 어쩔 수가 없어서 잠시 그랬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6.25때 공산군이 예배당에 들이닥쳤습니다. 예배드리던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서 한 곳에 세워놓은 다음, 예배당에 걸려있던 예수님 사진을 교인들 앞에 던졌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의 사진에 침을 뱉고 발로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준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선 살고 봐야지요. 당장 살아야 다음에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부터 시작해서 모두 예수님의 사진에 침을 뱉고 발로 밟고 지나갔습니다. 다들 속으로 그랬겠지요. '주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주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없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다음에 더 충성하고 더 주님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주일학교 학생이 차례가 되어 나오더니, 그 예수님의 사진을 집어들고 자기 옷으로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께 침을 뱉고 발로 밟는 것보다 차라리 예수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믿음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른들보다 훨씬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이지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어요.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베드로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까? 정말 주님의 이름을 부인해야 살 수 있는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으세요? 아닙니다. 우리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살겠다고 얼마나 자주 주님을 부인하는지 모릅니다. 총을 든 공산군이 눈앞에 왔다갔다하는 것만이 그런 위기가 아니에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적당히 타협해서 눈감고 지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했던 일입니다. 시험을 칩니다.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그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합격을 해야겠다면, 이것이 주님을 부인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선언한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 그리스도인 아니야.' 이러면서 슬쩍 넘어갑니다. 위기를 모면했어요. 그런 다음에 웃는 낯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가히 철가면의 작위를 받을 수 있겠네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님을 모른다고 한 후에 베드로는 다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심히 통곡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두꺼운 철가면을 쓰고 삽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아니 그냥 거리를 지나가면서도 수없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든요. 그래놓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주님 앞에 나옵니다. 무엇이 잘못되어 있습니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지 않나요? 바로 닭 울음소리예요. 우리가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현장에서 그것이 큰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우리 양심의 알람 기능이 꺼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것이 잘못인지, 그래도 되는 일인지 의식을 못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 닭은 사방에서 목이 터져라 울어대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우리로 하여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닭 울음소리입니다. 성경을 펴 보세요. 그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 닭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만난 베드로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비록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다 한들, 어찌 영혼의 생존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그런 심각한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사소한 눈앞의 이익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일이 너무 많지 않아요? 그 베드로를 주님이 부르십니다. 닭 울음소리 속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베드로 여러분, 비록 우리가 믿음이 연약해져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을망정,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다시 맞아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그 주님의 품에 안기세요. 심히 통곡하는 우리의 눈물을 씻기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그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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