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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늙어 가는 아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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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랩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이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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