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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가장 낮은 곳 (눅 0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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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가장 낮은 곳 (눅 2:8-14)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에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대조적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왕궁이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의 입을 통해서 왕이 태어나셨다고 선언됩니다. 아기 예수는 이 박사들의 경배를 받고 왕께 올려지는 예물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외양간이 배경입니다. 화려한 왕궁이나 멀리서 찾아온 박사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 낳은 아기를 뉘울 곳이 없어 말밥통에 뉘어야 하는 엽기적인 비천함이 그 분위기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탄생을 맨 먼저 알고 찾아와 경배를 드린 것도 밤을 새워 찬이슬을 맞으며 들판에서 일을 해야 했던 하층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해서 왕이신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은 곳으로 찾아오신 구세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도 서로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정통성이 희박한 유대왕 헤롯의 시대를 배경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에 의해 온 로마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호적정리의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오셨다는 선포인 것이지요.

로마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고향을 찾아 돌아가야 했고, 그래서 어느 곳이나 여행객들로 붐비게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운송업계와 숙박업계, 거기다 어쩌면 요식업계까지 대호황을 맞게 되었겠군요. 주민등록증 하나만 갱신하게 되어도 사진관이 때 아닌 호황을 맞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온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고향을 찾아가야 하는 대이동이 있었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번잡했겠어요? 요즘은 휴가철이 돼서 숙박업계가 호황중입니다. 우리가 코로만델 한번 가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숙박할 곳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서 포기했습니다. 만삭의 아내를 대동한 요셉이 고향 베들레헴에 왔을 때는 웃돈을 주고도 하룻밤 머물 곳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마을 베들레헴에 여관이나 호텔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렇다고 그곳이 관광지도 아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고향이라고 찾아오기는 했지만, 요셉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입니다. 저 북쪽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살던 요셉이 이 남쪽 베들레헴에 언제 한번 와보기를 했겠습니까? 무슨 친척이나 친구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조상 다윗이 살았던 곳이라서 고향이 된 것입니다. 제가 전주 이씨라고 해서 전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요셉에게 있어서 베들레헴은 그저 전설 속의 고향일 뿐, 전혀 낯설고 생소한 곳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하룻밤 신세질 곳이라도 있었겠어요?

거기다가 홀몸도 아니고 만삭이 되어 거동도 불편한 아내를 대동하고 왔으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요셉으로서는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아내릴 일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벌써 진통이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이러다가 잘못하면 길거리에서 보자기를 펴놓고 아기를 낳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네요.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이 어느 집에서인가 외양간이라도 빌려주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의 어느 이름 없는 집 외양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예수의 요람은 말밥통에다 보자기를 깔아서 급히 만든 것이었습니다. 태어난 곳은 외양간, 그리고 말밥통을 요람으로 삼았다는 이력서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불쌍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고, 말밥통으로 요람을 삼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비천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 이렇게까지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엊그제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보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선거였다고 말합니다. 애초부터 선거전이 서민 대 귀족의 대결구도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노무현 후보가 서민인 것은 아닙니다.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무슨 서민후보냐고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 않습니까? 사법고시에 합격함으로써 최고의 상류층에 편입된 사람이지요. 정치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서민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당선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라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서민들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출신이 서민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돈이 없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직업이 없이 빈둥거리며 살아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이제는 심지어 대통령까지 되었다는 것은,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 힘들고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돈 없어서 대학 못 가고 가난해서 박대당하며 사는 사람들은 노무현이라는 입지전적인 인물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노무현이도 나처럼 돈 없어서 대학 못 갔어. 노무현이도 나처럼 공사판에서 막노동하고 살았었대. 그런데 그 노무현이 이제는 대통령이야. 이처럼 노무현과 자신이 동일화되면서 서민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이 대통령이 되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실 정도로 비천하게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고 처참해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님은 인간의 현주소인 비천함 그 자체를 이 땅에 오시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비천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에 동화되는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이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방인이란 같이 앉아 식사도 할 수 없는 결코 상종해서는 안 될 종자가 다른 인간들이었으니까요. 유대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결코 구원받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지요. 만일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이렇게 비천하게 묘사했더라면 유대인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대로 혼자 잘났다고 목에 힘주고 다른 사람들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왕으로 구세주가 오셨다고 한다면 이방인들은 그 구세주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을 떠나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낮고 천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이 우주적인 사건을 맨 처음 접한 사람들이 바로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밤새 들판에서 양을 지키는 이 목동들은 소위 3D 직종 가운데 하나 아니었겠어요? 가장 힘없고 돈도 없는 하층민들이지요. 그런데 구세주가 오셨다는 이 놀랍고 기쁜 소식이 그 가난하고 천대받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천사가 나타나서 그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남들 다 자는 밤에 잠도 못 자고 추운 들판에서 밤을 새워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대우해주지도 않았는데, 천사가 이들을 만나주었습니다. 이 낮고 천한 노동자들을 천사가 찾아오다니 이렇게 황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그보다 훨씬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고 선물을 주고받고 백화점마다 떠들썩하게 빅 세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버림받고 냉대당하는 사람들을 따뜻이 보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과 멸망을 받게 된 우리 죄인들, 그래서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이 영원한 형벌만을 기다려야 했던 우리들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에게 주어진 구세주의 표시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였습니다.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던 목자들에게도 이것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 자기들보다도 훨씬 더 불쌍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을까요? 만일 목자들이 그냥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다면 결코 구세주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겠지요. 천사의 증언과 하늘에 울려퍼지는 천군천사의 합창이 아니었더라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높아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쁨이 지나쳐 특권의식으로 변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우리의 마음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나요? 이방인은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는 유대인들처럼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당 건물의 높이를 따라 높아져만 가는 교회의 콧대와 예수 믿는 사람끼리 똘똘 뭉치는 이기주의 속에서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셨던 곳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낮은 곳이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그처럼 낮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의롭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 속에는 결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둘 수 없습니다. 그분은 훨씬 낮은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을 때, 우리는 아기 예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그 동안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을 만나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왜 거리마다 구세군 냄비가 걸리고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모으겠습니까? 1년 중 하고 많은 날 중에 왜 하필이면 성탄절이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시즌이 되었겠어요? 물론 주님이 오신 깊은 의미를 파악하고 불우이웃 돕는 행사들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누구보다 낮고 천한 모습으로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까? 그렇게 주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성탄절이 흥청망청 먹고 즐기는 하나의 명절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탄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할 날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그 의미를 알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과 그저 하나의 명절로 기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지나면서 낮은 곳으로 찾아오셨던 주님을 기억하고 더 겸손해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어렵고 궁핍한 이웃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낮은 곳으로 찾아오셨던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 모두에게 덧입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으로 기쁘고 감격스러운 성탄을 맞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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