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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아내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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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음성은 낮고 맑았다. 나는 그가 높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와 30여 년간 같이 살았지만 아내와 언쟁 한 번 해본 일이 없었다. 남들이 들으면 곧이 듣지 않을 정도로 단 한 번의 언쟁도 해본 일이 없다.

이것은 내가 잘해서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 것이 아니다. 아내의 착하고 어진 마음 때문에 우리들이 꾸미는 가정에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나는 46년 2월에 혼자 월남했고 아내는 혼자 남아 있다가 그해 5월에 38선을 넘었다.

나는 월남할 때 한 권의 책도 가져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기를 데리고 이불 없이 2년을 살았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아내는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학교에 있었는데 책을 한 권도 가져오지 못했으니 학생들을 가르칠 양식이 없었다.

그래 나는 큰 마음을 먹고 얼마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월급을 받으면 생활비도 내놓지 않고 그 돈으로 책을 샀다. 나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돈없이 한 달을 살아보자고 했다. 아내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늘 울곤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아내가 흘린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아내는 기가 막히게 고생스러우면 늘 울곤했다. 나는 본시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가족들에게 고생을 많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것이 많았지만 그 때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 가난한 생활을 불평 없이 이끌어 간 아내에게 나는 지금도 마음으로 사죄하고 있다. 5.16후에 화폐개혁이 있었다. 60만환짜리 전세로 있었는데 그것이 6만원으로 변해버렸다. 우리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갈 곳이 없는 우리는 지금의 수유동으로 그것도 오막살이를 얻어 이사를 했다. 그 때는 교통이 말이 아니어서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가 밤 10시면 미아삼거리에서 끊어지고 만다.

늦게 돌아가다 차가 없으면 걸어가든가 아니면 어느 여인숙에서 자고 아침 일찍 집에 돌아간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내에게 참으로 미안했다. 그렇지만 아내에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어디서 잤느냐고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언제나 장미가 피듯이 웃고 말았다. 아내는 참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아내의 마음이 하도 착해서 아내를 거짓말로 속일 수가 없었다.

일본 어느 학자의 말이 생각이 난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남자로 태어나고, 내 아내가 죽었다 다시 여자로 태어난다면 아내는 몰라도 나는 다시 그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 그녀가 원한다면 나도 내 아내와 다시 결혼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본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영혼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사랑하던 사람이라고 해도 어찌 알아볼 수 있을까. 살아있을 때 서로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걸.

지금도 아내의 영원한 집에 가면 잔디가 무성하고 봄산엔 소쩍새가 울고 있다. 중국 소주땅에 서시가 놀던 고소대가 있다기에 찾아 갔더니 누각은 간 데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사람은 후회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유명을 달리한 후에 후회하면 무엇하며 뉘우친들 무엇하겠는가. 아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11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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