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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변화시키는 부활신앙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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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과 부활

기독교를 가리켜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고, 이 부활이 빠지면 기독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기독교에서 왜 부활이 필요한가요? 우리가 구원받는 데 왜 그리스도의 부활이 필요한 것입니까?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전제됩니다.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것은 인류의 죄값을 치르신 것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바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라도 우리가 저질러버린 죄들을 없던 일로 만들어 주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들을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리스도의 목숨으로 그 대가를 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없어졌고,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작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는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 대신 멸망을 당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에 붙잡히시고 그 어둠의 세력에 갇혀 있다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병사들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왕이 적에게 사로잡혔다면 그 전쟁은 완전한 패배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포로로 잡아 감옥에 가두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의 왕이 그 죽음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도 그 죽음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 자기를 붙잡아 가두었던 그 죽음을 때려눕히시고 감옥의 열쇠를 빼앗아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킨 대역전의 결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이 없으면 구원도 없고, 우리의 믿음은 부활신앙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사람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활이야말로 구원의 완성인데, 즉 부활을 믿어야 구원이 가능한데, 이 부활이라는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자 그 똑똑한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놀렸습니다. '너 지금 농담하는 거니?'

우리가 아테네 사람들을 탓할 것은 없습니다. 이성의 시대가 휩쓸고 간 이후 19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활신앙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가 부활을 포기하고 기독교일 수 있단 말입니까? 10여 년 전에 한국의 한 유수의 신학대학에서 교수들의 신학사상이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신학교 교수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된 교수가 해명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그는 당연히 부활하셨고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신다. 그러나 부활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무슨 얘깁니까? 대부분의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똑똑하고 성경을 많이 연구한 신학자들이 이렇게 헛소리를 해댄다는 말이죠.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이 생물학적입니까? 상징적입니까?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하는 천사의 말은 무엇이고, 베드로가 들어가 보았던 빈 무덤과 세마포는 또 무엇입니까?

독재 권력과의 투쟁과 민주화 과정의 혼란기를 거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위 민중신학은 부활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전에는 늘 얻어터지고 빼앗겨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던 민중이 '아하 이게 아니구나. 내가 이유없이 당할 필요가 없지. 나가 싸워서라도 우리 살 길을 찾아야겠다' 하고 자의식을 갖고 나서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를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면서 담대하게 나가 외치게 된 것, 바로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지요. 즉 이들은 부활이라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사건을 변호하고 고수하기보다 그 사건이 가져온 가시적인 변화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바울과 아테네 사람들을 화해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글쎄요, 아테네 사람들은 동의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펄쩍 뛸 것이 분명하군요.

3. 부활을 체험하고 변화된 사람들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의 태도와 삶이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체험한 결과이지 그것 자체가 부활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을 완전히 딴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기 선생이 붙잡혀 가는데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던 겁쟁이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서 특공대 용사들로 변했습니다. 자기 선생이 부당한 재판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겨우 한 하녀에게 '나는 저 사람 몰라' 하며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는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대담하게 오히려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켰을까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이었고 진리였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믿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을 때 그들의 모든 꿈과 기쁨도 끝이 났습니다. 마치 꿈을 꾸다 깨어난 아이처럼, 마술이 풀려 다시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신데렐라처럼, 잠시 전의 아름답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반면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은 너무나 허탈했겠지요. 이제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과거의 그 아름다웠던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 밖에 없겠지요.

그런 좌절과 고통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그날 아침 느닷없이 날아온 소식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그 주님은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입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거나 많은 돈을 가졌어도 그것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당하는데, 그 스트레스의 강도가 가장 큰 사건은 배우자가 죽는 일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고갯길을 혼자서 넘어가다가 한 젊은 여인이 새로 써서 아직 흙으로만 덮여있는 무덤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남편이 죽은 것 같지요? 그 여인의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슬퍼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걸 보면서 남편이 저 무덤 속에서 살아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학살했을 때 어머니들은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일은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로서는 사랑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가 되찾은 차원의 기쁨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이지요. 즉 이 예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든 것이 믿어지고 확증되는 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아무리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의미 있는 일을 행하셨어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때에는 깨닫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 시원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아무리 설명을 듣고 읽고 또 읽어도 알 듯 말 듯 속시원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잠깐 돌아서면 잊어버리지요. 그러다가 무슨 계기가 되어 그것이 뻥 뚫리는 수가 있습니다. 아리송했던 것들이 명쾌하게 보이는 것이죠.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 유대인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네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무슨 표적을 보여서 너의 정당성을 입증하겠느냐?'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겠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멍-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몰랐지요.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요한이 기록했습니다(요 2:22).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도 제자들은 왜 사람들이 예수께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즉 부활하신 후에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요 12:16).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깨닫고 믿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할 때 그 믿음이 어느 수준에 있는 믿음인가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끝나버렸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왕께서 아직 죽음의 세력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입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상태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 제자들이 그날 새벽 사망의 죽음을 선포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에 모든 것을 밝히 깨달아 믿고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된 것처럼,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고 믿을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승리하는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 이 부활신앙이 여러분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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