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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을 소유한 사람 (마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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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은 타락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천국을 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의 행적과 사역을 면밀히 살펴보았던 마태는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천국 복음이라고 했습니다(4:23, 9:35). 마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24:14) 라고 하시면서 천국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천국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빼버리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껍데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럴듯한 사상체계나 가치있는 교훈집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천국 없는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가져다주지 못해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체계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추구되어야 할 내용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천국에 갈 확신이나 소망이 없다면, 제가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는 100%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며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선교사가 되고 하는 일들이 아무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거나 마음의 평안을 누리거나 교양을 쌓거나 또는 현실적인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오직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 아니겠어요?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약속받았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천국을 가져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까지 희생시키면서 이루시고자 했던 엄청난 인류구원이라는 계획이 자신의 삶과 인격 속에서 성취된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지요. 그러니 더 이상 뭘 바라겠어요?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행복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그치게 하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는 그 천국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누리게 되는 행복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행복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 때문이었지요.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천국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우리가 그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고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됨으로써 갈 수 있게 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행복론,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맨 첫 번째로서 주님이 천국을 소유하는 행복을 말씀하신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행복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이 행복, 천국을 소유한 행복을 갖지 못했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아요? 만일 여러분 가운데 이 천국을 소유한 행복을 갖지 못한 분이 있다면, 우선 이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믿으세요. 그리고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세요. 이 천국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 위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맛보게 될 기쁨을 여기서 미리 맛봅니다.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여기서 미리 살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의 행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떤 사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시는가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다' 이런 말을 쓰는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가난할지라도 마음이 넉넉한 사람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게 살지요. 그렇다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개념에 의하면 좋은 말이 아닙니다. 가진 것은 많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면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어떻게 차별할 것인지는 언어의 유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 않아요? 문제는 우리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어떤 의도로, 어떤 의미로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령이라는 말은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영혼 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poor in spirit이라고 합니다. 원문인 헬라에서도 영어로 똑같은 구조입니다.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를 굳이 직역을 한다면 '영혼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쯤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설교현장을 기록했던 누가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의 행복에 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던 것이 분명한데, 어떤 때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셨고, 어떤 때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실제로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심령도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구별의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제자들의 가난은 그들의 심령이 가난했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스스로 가난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은 재산의 적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과 가장 가까운 우리말 표현은 마음을 비운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과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에는 약간 어감의 차이가 있지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높아진 마음을 낮춘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마음의 지배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하시는 일에 반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될 때 자신의 미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가난함을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서 우리의 비천함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보게 됨으로써 심령의 가난함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심령도 가난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결핍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가난하면서도 마음은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난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우리가 룻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셨다'며 기꺼이 낮은 자리에 처했던 나오미의 모습을 보았었습니다. 나오미는 가난 속에서 심령까지 가난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심령이 가난하기 어렵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게 되기 쉽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도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부자이면서도 심령이 가난했던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욥입이다. 동방에서 가장 유력했던 사람이었고, 흠잡을 데가 없는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였던 그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모든 재산과 열 명의 자녀들을 한 순간에 다 잃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고백을 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아가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하나님의 높으심과 권리를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이나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덕목으로 말하자면 겸손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바로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효과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일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높아진 상태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몹시 못마땅해 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란 하나님의 높으심과 권위에 대한 반항이며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었지요?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했으며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심령은 가난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대단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에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영적으로 부요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실 정도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두셨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부요했지만, 바울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라고 불렀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라고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심지어는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복음을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하였고 더 많은 능력을 행했으며 더 많은 열매를 맺었지만, 바울은 자신의 공로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가치함, 자신의 무능력함을 발견한 것, 이것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의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헌신과 하나님을 위한 수고를 나열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마음은 너무나 높아져 있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자신의 비천하고 무가치함을 처절하게 통감하여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또 한 명 보는군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를 더 의롭다고 판정하셨습니다. 세리는 행복을 가슴에 가득 안고 내려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찾기 위해 얼마나 바쁘게 일하며 수고하는지 모릅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억울함도 참습니다. 그렇게 구하고 찾는 것도 일종의 행복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진짜 행복하게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권위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낮아질 때, 비로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수록 주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차고 넘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질수록 주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반항하고 도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굴복한 영혼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능력, 공헌도를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항복한 심령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천국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천국을 내 것으로 가지고 계시나요? 그 행복을 지금 누리고 계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주님이 위대하신 선언이 여러분의 인격 속에서 지금 성취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천국을 소유한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머잖아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 영광 가운데 살게 된다는 것만큼 놀랍고 가슴 설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행복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가득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혹시 아직까지 이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확신이 없었다면,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이 행복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행복이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행복을 여러분에게 지금 나누어주고 계십니다. 그 주님 앞으로 나가 그 행복을 받으십시오. 천국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으세요. 그래서 이 행복이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찬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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