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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굶주림 (마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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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시는 행복한 사람이란 결국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천국을 가진 사람, 즉 타락한 인간, 멸망하게 된 인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행위로 인해 혜택을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의 행복은 그렇게 천국을 소유하게 된 사람의 여덟 가지 특징입니다. 여덟 가지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 종류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여덟 가지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복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다,' '복 있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천국 시민, 참으로 행복한 사람의 네 번째 특징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고, 또 온유하게 된 사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인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표현은 쉽게 말해서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이 얼마나 음식을 간절히 원하겠습니까? 여기서 굶주린다는 표현은 어쩌다가 한두 끼 건너뛰어 배가 고픈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굶주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고 삽니다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배고픔이란 것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체험하면서 살아야 했었습니다. 입에 풀칠한다는 표현이 있었던 것처럼,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만났을 때 문안하는 인사가 무엇이었나요? '식사 하셨어요?' '밥 먹었니?' 정말이지 이 인사말은 고난과 슬픔이 얼마나 진하게 배어 있는 말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저의 어떤 친구는 어렸을 때 너무나 배가 고파서 동생과 함께 흙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수년 전 뼈 위에 가죽만 남은 채 굶어 죽어가던 소말리아의 아이들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를 독수리가 저만치 떨어져 앉아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타임지에 실려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구호단체에서 먹을 것을 배급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더 받겠다고 손을 내밀던 장면들이 TV의 화면을 채웠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한 덩어리의 빵인 것입니다. 빵 한 덩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걸 수 있습니다. 어차피 그 빵을 구하지 못하면 목숨도 부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붙잡히면 총살을 당하거나 맞아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만강을 건너고 압록강을 건너 도망치는 탈북자들의 실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 앉아 한가하게 굶주림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굶주림의 고통 가운데서 빵 한 덩어리와 목숨을 바꿔야 하는 그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굶주림이란 그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것이지요.

목마르다는 것은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영화 같은 데 보면 뜨거운 모래 위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읽었던 탐험 이야기에 어떤 탐험가들이 사막에서 낙타의 오줌을 받아 마시다가 구역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이 나요. 오죽했으면 낙타 오줌을 마셨겠어요? 태양과 모래뿐인 그곳에 존재하는 액체는 시원하게 배설되는 낙타의 오줌밖에 더 있나요? 배가 고픈 것은 그래도 조금 더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갈증은 참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시시각각 육신과 정신을 목졸라오는 고통입니다.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은 세상의 권력이나 금은 보화도 아닙니다. 고상한 철학이나 숭고한 사랑도 아니에요. 오직 한 컵의 시원한 물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사모하고 물을 갈급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고 갈급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기싸움에서 진 개가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는 것처럼, 어깨가 처지고 눈길 둘 곳을 찾기 어렵게 되고 맙니다. 사실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의에 굶주려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느 정도나 의를 추구하고 살았습니까? 우리가 정의 편에 서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막의 여행자들이 물을 갈망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의를 갈망하고 산 적이 얼마나 됩니까?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많은 분들이 생업에서 쫓겨나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불의에 저항했습니다. 나름대로 그분들은 정의에 굶주린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자존심과 자긍심이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그들을 지탱해 주었는지 모르지요. 어쨌든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뭔가를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 힘이 없습니다. 추진력이 없어 끌려가는 인생이 되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을 집중해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정도가 보통 이상이면 매니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도가 아주 심하면 미쳤다고 하지요. 골프에 미쳤다, 컴퓨터에 미쳤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자동차에 미친 사람이면 집을 팔아서라도 자동차를 사겠지요. 또 어떤 경우는 돈에 환장했다는 말도 합니다.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하는 말인데,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 목말라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남들 놀러가고 여가를 즐기고 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꾸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지요. 어차피 뭔가를 추구하고 심하면 그것에 미쳐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기왕이면 돈에 미치는 것보다 지식에 미치는 것이 낫고, 그보다는 정의에 굶주려 사는 것이 훨씬 값지고 의미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직업을 빼앗기는 것도 감수할 수 있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고난도 마다하지 않던 사람들처럼, 우리가 바로 그렇게 의에 굶주려 있듯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하는 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한다고도 하셨지요? 그렇다면 우선 의의 개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의라고 하면 옳은 것을 의미합니다. 도덕과 윤리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의는 성경이 말하는 의에 비추어 보면 파생적인 개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란 옳고 도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의 개념이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의라는 것은 빗나가지 않고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 의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모범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시던 모습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나의 뜻을 포기하는 것, 나의 주장과 나의 속성이 죽고 하나님의 원대로 나의 삶이 진행되는 것, 이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우리를 맞추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채 옳고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엡 5:1)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죄로 인해 왜곡되고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자신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셨습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 원래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원수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하게 되었다는 관계성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상태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이 다소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매우 명확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인간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우리처럼 사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교과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한 다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엡 5:2)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동의어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께 맞추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의의 원론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하는 의의 각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는 의의 파생적인 개념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고 도덕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의의 파생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맞추어 사는 의로운 생활은 이 세상에서 옳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당연히 포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불의를 묵인하고 심지어는 그 불의의 조성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런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자, 그럼 우리의 삶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얼마나 의에, 정의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 싸우고 불의에 맞서서 있습니까? 파도타기에 미친 사람들은 즐길만한 파도를 찾아서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의에 미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런 열심과 정신으로 의를 행하고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애쓰며 살고 있나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불의를 행하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로는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의를 찾아 나서야지요. 많은 경우에 의를 위해 산다는 것은 불의에 대적하고 항거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고, 또 불의를 행하는 주체는 권력이나 사회적 구조와 같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수가 많기 때문에, 의를 위해 산다는 것은 핍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의를 위해 산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감옥에 가기를 각오하고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의를 행한다는 것이 꼭 그렇게 힘있는 상대와 싸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의를 위해서도 우리는 많은 결단과 자신과의 투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굶주림과 목마름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이 한번 음식을 잔뜩 먹고 배가 불렀다고 해서 다시는 굶주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막에서 죽을 뻔했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나 물을 맘껏 마신 후에는 물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물통을 버리겠어요? 굶주림과 목마름은 반복되고 계속되는 것이고 그래서 또 다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굶주림과 목마르다는 원어의 단어는 페이논테스와 &46382;손테스인데, 현재분사형으로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동작의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의 계속적인 상태를 말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러한 동사들이 현재형으로 쓰였다는 것은 한번 배고팠던 사람이나 한번 갈증을 경험했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의로운 일을 했다고 우리의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우리의 의에 대한 굶주림이 다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반복해서 쉬지 않고 의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할 천국 시민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늘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그 굶주림과 목마름은 풍성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가 하늘에서부터 땅끝까지 가득하게 되는 것을 감격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세력이 완전히 패망하고 그 불의에 항거하면서 고난을 당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의를 위해서 애통하고 굶주렸던 사람들만이 이 소유하고 맛보게 될 행복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의에 굶주리지 않아도 되고 목말라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의를 향한 거룩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거룩한 굶주림을 행복의 선물로 주십니다. 이 굶주림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불편하고 불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의에 대한 굶주림은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천국을 소유한 행복 가운데 사는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굶주림의 행복이 여러분의 삶 속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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