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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결한 마음으로 보는 하나님 (마 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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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사람은 소련의 유리 가가린입니다. 그는 우주로 날아가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지구가 푸른 빛 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눈으로 확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늘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데 내가 하늘에 가 보았어도 하나님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미국의 한 소녀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저씨의 마음은 깨끗했나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말씀을 듣는 당시의 군중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는 자기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 블레셋에 빼앗긴 여호와의 궤가 우여곡절 끝에 유다의 지경인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이 여호와의 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궤짝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에서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70명, 또는 5만 70명의 벧세메스 사람들을 죽이셨습니다(삼상 6:19). 성전에 들어갔다가 여호와의 영광을 본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볼 수 없는 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은 자유롭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범죄하고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을 수가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신데 반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타협될 수 없는 죄악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시며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구원이 나오고 오직 그에게만 소망이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구원이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를 감추시고 인간으로부터 떠나신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변장하고 찾아오신 하나님과 점심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뒷모습이나마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마노아도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고 걱정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던 이사야도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는커녕 그렇게 나타나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깨어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이 이제는 친근한 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바라보면서 교제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신분과 상태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축복인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러자 우리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예수님과 빌립이 왜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전에 예수님은 유명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고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여기서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말씀이 빌립으로 하여금 그런 요청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아버지를 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입니까? 옛날 조상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흥분이 되고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그 하나님을 한번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주여, 말씀만 하지 마시고 그 아버지를 한번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위대한 사건은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인간이 하나님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하는 놀라운 변화를 동반했습니다. 그렇게 감취어 있었던 하나님, 함부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충분히 자신을 계시해 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비교한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고 삽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산다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한번 보여달라고 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해요.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을 보고 싶기는 한가 봐요. 그러나 안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보고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아요?

여기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이 맑고 깨끗해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즉 인격적으로 인지하는 심오한 영적 경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차피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을 가지고 파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인지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본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특히 히브리 사상세계에서 안다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다는 동작이나 상태는 주체와 객체가 동일화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러니까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할 수 없고, 그래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답답하고 비참해집니까?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그 하나님이 사라져버렸을 때, 맥이 빠지고 낙심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믿음이 흔들리고 갈팡질팡하게 됩니까? 왜 마음 속에 분노와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까? 왜 부부간의 갈등이 깊어갑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다른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 대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낙심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비참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사람이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남을 비난하며 불행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까? 누가 그런 행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인생을 살 때,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을 때,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영어로는 heart라고 합니다. heart는 심장이니까 가슴에 있지요. 그러나 마음이 머리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의지와 지성과 감정의 좌소(座所)로 간주됩니다. 두려움과 용기, 사랑과 욕망, 기쁨과 질투, 미움과 행복 등 모든 것이 마음에 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고 그가 하시는 일을 엿보고 있을 때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막 3:5)는 표현은 그들의 의지가 악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을 때,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했다(막 2:6)고 했는데, 이것은 지성의 작용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다(눅 24:32)는 것은 감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마음이란 의지, 지성, 감정이 활동하는 자리입니다.

또 마음은 속임수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마음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막 7: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저의 마음 속을 생각만 해도 얼마나 거짓되고 악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변덕이 죽 끓는 듯한지, 얼마나 간사하고 더러운지... 만일 마음이 들여다보인다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 남들은 알 수가 없어요. 종교는 의식(儀式)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를 잡아 번제를 드리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거짓과 악독과 증오와 분노가 가득할지라도 회당에서의 기도와 십일조와 금식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있으면 성공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역겨운 존재였을까요?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헌금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을 해야 하나님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세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그래서 그는 또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그렇습니다. 청결한 마음은 우리의 노력이나 교육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가능해진 기적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요 1:13)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보고 사는 행복을 다른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주시는 이 행복이 여러분의 삶에 늘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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