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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할 수 있나요? (마 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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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할 수 있나요? (마 5:10-12)

여러분, 도레미송 아시지요? 도로 시작해서 레미파솔라시를 거쳐서 다시 도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팔복, 즉 여덟 가지 행복을 살펴보면서 마침내 이제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도로 시작해서 다시 도로 돌아가는 도레미송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로 시작한 행복 이야기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예수님의 행복론을 쥴리 앤드류스의 도레미송에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행복 이야기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핵심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시작과 행복의 끝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덟 가지의 행복은 각기 다른 개별적인 행복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행복을 가진 사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갖게 되는 다양한 모습의 행복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천국을 소유했다는 것은 동의어가 됩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가령 인간관계를 위해서나 교양이나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교회에 나온다거나 또는 마음의 평안과 자기성찰, 인격의 함양을 위해서 기독교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또 예수 믿는다는 것의 의미도 전혀 알지 못한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천국은 무엇입니까? 그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마태는 천국, 즉 하늘나라라고 표현했고, 누가는 똑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 나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고 선포하신 것이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인간에게 천국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이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의 조건은 상당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행복의 조건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천국이라는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은 자신이 그 천국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는 사람, 그래서 온유하게 된 사람, 그 의를 사모하는 사람, 또 자신의 분수를 알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분쟁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내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큰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슬퍼하고 자비를 베푸는 내적인 성숙과 희생의 정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 성경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해야 올바른 번역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현재완료 시제가 사용되었는데, 우리 성경처럼 '핍박을 받은 자,' 즉 과거에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위해서라면 헬라어에서 과거완료나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어 성경을 보세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those who are persucuted'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 성경처럼 핍박을 받은 시점을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됐지, 그 시점이 무슨 중요한 얘기라고 한참 떠드느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핍박을 받는 순간과 행복을 누리는 순간이 동일하냐, 아니면 차이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면, 핍박을 받고 있는 순간에는 무척 불행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핍박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면 핍박을 받는 순간도 비록 괴로울망정 불행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큰 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의 상급을 생각한다면 핍박을 받은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하늘에서 상급을 받을 때는 핍박을 받은 것이 과거의 사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그런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핍박을 받는 순간에 슬퍼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행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역설입니까?

사실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론은 모두 역설이었습니다. 슬퍼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었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도 우리 사회에서는 도무지 발생할 수 없는 역설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모두 역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천국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천국,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행복의 조건이 오늘 살펴보고 있는 이 여덟 번째의 행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이 일어날까요? 의를 행했으면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세상에서 우리가 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세상이 의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폭력과 증오와 욕망으로 물든 세상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비롭고 온유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너무나 기뻐할 것처럼 생각되지요? 악한 세상에 의인이 태어나면 온 세상이 기뻐하고 환영할 것 같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벨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받아야 했던 것은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라는 핍박일 뿐이었습니다. 아벨이 형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미워한 것도 아니고 시비를 건 적도 없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의롭다는 이유 때문에 의롭지 않은 가인에 의해 핍박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만큼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노아라는 한 의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다고 표창장을 받기는커녕 미친 영감이라고 놀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하셔야 할 만큼 악했던 소돔 성에서 롯이 그들의 죄악에 동화되지 않고 혼자서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야 했던 이유는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던 죄 때문이 아니라 여주인의 유혹을 거부한 의 때문이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 핍박을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참 슬픈 세상이지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예언하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그리스도인으로, 의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핍박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의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핍박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의 행복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의롭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롭게 된 결과가 바로 여덟 번째 행복에 나오는 핍박입니다. 의롭게 되었으면 그 결과로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핍박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파괴합니다. 핍박은 상의 형태가 아니라 벌의 형태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벌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 상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상을 받아야 할 의롭다는 이유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만들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이중의 상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세금을 다 냈는데 또 세금고지서가 날아와서 세금을 이중으로 냈다고 합시다. 그것이 나중에 밝혀지면 두 번째 낸 세금은 돌려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정의는 상 받을 일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벌 받을 일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켜지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을 받아야 할 의 때문에 상을 받기는커녕 벌을 받았으면 어떤 조치가 반드시 취해져야 하겠습니까? 마치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낸 것과 마찬가지로 받지 않아야 할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핍박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정의가 반드시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핍박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의로웠다는 사실은 상을 받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 의에 대해서도 역시 반드시 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에게는 받지 않았어야 할 핍박에 대한 보상과, 또 마땅히 받아야 할 의에 대한 상급, 이렇게 이중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의로웠는데 핍박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의롭다는 사실에 의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더 큰 상급, 이중의 상급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세상에서 말하는 의, 즉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의의 개념 속에 포함이 되겠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이렇게 말씀하심과 동시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의와 주님 자신을 동일화시키셨습니다. 즉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 의의 나라에 속하게 된 사람이 세상 나라, 하나님의 의에 대적하는 세력에 의해 핍박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집이 불태워지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목숨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핍박을 받아야 될 이유가 됩니까? 예수 믿는 것이 무슨 그렇게 큰 죄가 된다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 옛날 로마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은 적이 역사상 별로 없다고 합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20세기 100년 동안에 세계적으로 2억에서 2억 5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는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박해로 유명한데, 기독교 마을의 아이들을 잡아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에 쇠고랑을 채워놓고 채찍질을 하면서 코란을 암송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비디오로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아무런 제약 없이 평화롭게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와,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당하며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목사가 골치 아픈 이야기만 해서 스트레스만 더 쌓이게 하고 있습니까? 중국에 와서 선교사들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된 북한의 한 형제가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남쪽의 형제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자유가 있는 곳.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 마음껏 찬양하고 마음껏 기도하며 마음껏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곳. 사실 우리는 말로만 듣던 자유라는 것을 이곳 중국에 와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세살 짜리 딸이 하나 있습니다. 내 딸만이라도 남쪽에 있는 형제 자매들처럼 자유롭게 신앙 생활할 때가 오기를 참으로 소원합니다.'

이 형제는 자유롭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남한의 기독교인들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 우리는 그 형제를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 형제에게는 더 큰 상, 이중의 상급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우리가 그 형제를 부러워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 핍박이 없다고 핍박당하는 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고난당하고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로는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를 할 자격도 없고, 이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도 뭔가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조 선교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가조(架弔)는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북한 국경 근방의 중국땅에서 탈북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저는 늘 그분으로부터 기도편지를 이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남쪽의 형제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했던 북한 형제의 이야기도 그 가조 선교사님의 기도편지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북한에 콜레라가 창궐해서 긴급히 약을 조달해서 보낼 계획이라는 편지를 받았지만 저는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난 겨울에 북한의 보육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옷을 보내겠다고 했을 때도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북한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가 막한 일들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뉴질랜드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때문에 지독한 핍박을 받고 있는 북한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각오로 일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가 북한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국제사회에 탄원서를 내는 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어려운 일보다 우선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해 헌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 주일에 특별헌금을 준비해서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무책임하게 살아온 죄책감을 속량하기 위해서라도 꼭 헌금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동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모아진 헌금은 전액 가조 선교사님께 송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역시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눈꼽만큼이나마 맛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형제들을 돕는 이 일이 참으로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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