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짓 율법의 사기극과 율법의 완성자 (마 05:17-20)

첨부 1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어느 부분이 가장 읽기 어렵던가요? 어떤 사람은 끝없이 이어지는 족보 부분이 어렵다고 합니다. 발음도 잘 안 되고 또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계속됩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또 그 누구는 누구를 낳고... 이런 부분을 읽다 보면 성경읽기에 흥미를 잃게 되고,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작정했던 계획이 좌절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많은 이름들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는 짜증만 내지 마시고, 나중에 천국에 가면 만날 사람이라 생각하고 차분히 읽으세요. 천국에 가서, ‘아, 바로 당신이었군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려면 어려운 이름들 나온다고 짜증내서는 안 되겠지요.

또 읽기 어려운 부분은 레위기나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 부분입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고, 염소도 잡고, 고운 가루를 어쩌고... 이런 내용이 한 번만 나오고 말면 정신차리고 읽을 수 있겠지만, 비슷한 내용이 또 나오고 반복되고 한없이 나열됩니다. 그러니 흥미를 잃게 되고, 구약이라면 어렵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야말로 신주 모시듯이 대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율법조항을 이마에 붙이고 소매에도 달고, 문 위에 붙여놓고 들어가며 나가며 늘 보고 외워야 했습니다. 특히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의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더 강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어 먼 나라까지 끌려가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는 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란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고 없애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모세를 통해 주어진 기록된 율법 뿐만 아니라 소위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미쉬나’라고 하는데 랍비와 장로들의 가르침을 수백년 동안 모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을 구체적인 세부규범으로 발전시키고 실생활에 적용시킨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는 손을 씻어야 한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손을 어떻게 씻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물을 많이 떠다 놓고 흘리면서 씻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고양이 세수하듯이 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한 번 씻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씻고 또 씻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명하신 결례를 행하는 데 있어서 아무렇게나 씻어서는 안 되고 정한 규례대로 씻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을 씻을 때의 규례, 발을 씻을 때의 규례... 이런 식으로 수많은 규례가 생겨난 것입니다.

또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율법 역시 애매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일하지 않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일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인가? 랍비들은 이런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하고 규례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례가 수십 가지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무화과 하나의 무게를 손에 드는 것까지는 일에 해당되지 않고 그것보다 더 무거운 물건을 들면 일하는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또 안식일에 2000규빗 이상을 걸어가면 여행하는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2000규빗은 1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보다 실생활에 직접 적용되고 가까운 이 미쉬나가 더 실제적이고 중요한 율법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이 미쉬나를 통해서 원래의 율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실생활에서 잘 지키게 되었느냐 하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무화과 하나를 드는 것과 2000규빗 걸어가는 것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규정이 있다고 이 사람들이 안식일에는 2000규빗 이상 걸어다니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예를 들어 5000규빗 되는 거리를 갈 일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1800규빗을 걸어간 다음 앉아서 쉽니다. 아직까지는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조금 있다가 새로 시작해서 1800규빗을 걸어갑니다. 이것도 2000규빗이 안 되니까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조금 쉬었다가 나머지를 걸어가면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도 5000규빗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쉬나가 가르치는 율법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뭐라고 해요? 눈가리고 아웅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행동은 모조리 이 미쉬나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프다고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까먹는 것을 옹호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음식을 그냥 먹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공을 한다거나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해서 먹는 것은 명백히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되거든요. 또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칩니다. 그래서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따지면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미쉬나의 한 구절에 목숨을 걸고 있는 바리새인들 보기에는 이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누가 율법을 파괴하고 있습니까? 얼토당토 않는 미쉬나 한 구절에 목을 매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까? 아니면 그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거대한 사기극을 파헤치고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까?

주님은 또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란 율법을 해석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을 압축해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 메시야의 오심과 그 사역입니다.

율법의 장황하고 지루한 그 제사에 관한 법들 보세요.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양과 염소를 죽여 제사를 드리라는 규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구약의 율법에서 말하는 그 모든 제사들은 무엇을 상징하고 예고하는 것인 줄 아세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소를 잡는다는 것은 죄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그 소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양이 죄인을 대신해서 피를 흘려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대신 죽은 소나 양의 피를 보시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종결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모든 죄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그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오랜 세월 구약의 율법이 담지하고 있던 내용들이 온전히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종교의 공간적 중심이었던 성전은 바로 그러한 제사가 행해지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하고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그 임무를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그런데 만일 우리가 지금도 그 율법의 조항들에 집착한다면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겠지요.

율법 가운데 이러한 제사와 결례 등에 관한 법, 즉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귀결되고 성취되었기 때문에 종결되었고, 더 이상 시행되어서는 안 되는 법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의 시민사회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시민법은 오늘 우리의 민법, 형법 등에 해당되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 법의 의의와 정신은 우리 신자들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지만 그 문자적인 조항 자체가 적용될 필요는 없고, 또 시대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라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이 율법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통치규범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존재할 이유나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이 세상의 메시야를 잉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릴 수 없다고 하시는 율법은 도덕법입니다. 이 도덕법은 십계명에 압축되어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의식법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법들이 있습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먹어도 되는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 등에 대한 규례들이지요.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입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고 소고기를 먹는다고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거룩한 삶을 상징하는 것들이었단 말이지요. 그러나 이 도덕법은 상징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함의 실천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시행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온전하게 나타남으로써 더욱 우리에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에 흠없이 사심으로써 그 도덕법을 온전히 시행하셨다고 해서 이제는 그 도덕법이 효력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 강조되어야겠지요.

이 율법의 목적은 의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 모든 조항의 요구를 충족하면 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죽으나 사나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을 매는데, 사실 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이 불가능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규정된 조항들은 모두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매우 의롭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를 보세요. 그 바리새인이 얼마나 당당하고 뻔뻔하게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지. 그러니까 그들의 율법이라는 것이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롬 10:3)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가짜였습니다. 사기였어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예수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그 의를 옷입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의를 옷입는다고 해서 무임승차하듯이 저절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에게 가장 연약한 부분은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행과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로마교회의 오류를 바로잡고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진리를 강조한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러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행함에 대한 강조가 없어진 거예요.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믿음만 있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어요. 말하자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보니까 한완상 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예수 믿으미들은 많은데 예수 따르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의 의를 옷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그분이 생각하셨던 것처럼,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가리켜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살아가는 현장에서 모두 작은 예수로서 또한 예수 따르미로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