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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 속의 살인 (마 0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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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 특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위나 말씀은 자기들이 알고 지키는 율법의 조항들과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바쳐서 지켜야 할 율법인데, 그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반대를 하게 되겠지요. 이것이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일반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율법이나 선지자, 즉 모세나 선지자들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치 자기들이 기준인 것처럼 행세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된 율법을 완전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율법이 불완전해서 그것을 완전케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완전케 한다는 말은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이 완전하게 그 역할과 의도가 성취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중요한 하나의 언어습관, 혹은 사용법을 발견할 수 있군요. 그것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모세나 선지자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듣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마 7:29).

이러한 언어의 사용이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라고 더 확신하게 되었겠지요. 서기관들이 권위를 갖는 것은 율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권위는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명을 소지한 사람이 왕의 권위를 갖지 않습니까? 아무리 불만이 있고 못마땅해도 “어명이요!” 하면서 그 노란 족자를 착 펼치면 누구나 그 앞에 바짝 엎드리지 않던가요?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이라는 권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이라는 권위를 잘 써먹고 있었습니다. 어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누구나 자기 앞에 엎드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썩 좋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자기 것도 아닌 권위를 가지고 마치 자기 것처럼 잘 써먹었단 말이죠. 사실 서기관들의 실패는 율법을 존중하고 율법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자기들의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율법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들이 다 존경을 받아먹은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얼마나 거만하고 겉치레에 치중했는가 하면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긴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하게 걸으며 허세를 부렸습니다. 교만하고 권위를 내세우고 대접받기를 좋아했어요.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막 12:38-39)고 하셨어요.

어쨌든 서기관들이 율법의 권위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백성을 가르친 것에 비해 주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것이 옳다... 율법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건 잘못되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다. 이것이 옳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이런 식입니다. 왕의 권위는 어명이 적힌 종이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어명의 권위가 왕의 권위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왕은 어명보다 더 높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명을 전달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명을 발하는 왕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듣기에는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 높으신 서기관 나으리들이 말하는 방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높으신 서기관들은 얼마나 열이 받겠어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한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을 봅시다. 먼저 살인에 대한 계명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즉 옛날 모세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계명에 의하면,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 즉 재판을 받게 된다고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 십계명의 여섯 번째 조항을 보면 그냥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 살인하면 재판을 받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살인자에 대한 재판을 언급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은 도피성으로 피난을 갑니다. 피해자의 직접적인 복수가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가족이 그 살인자를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의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면 그런 사람을 보호하는 성이 있었는데, 그리로 도망쳐서 숨어 있다가 정당하게 재판을 받아 진실을 밝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살인하면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살인에 대한 죄값은 사형입니다. 그래서 살인하면 사형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율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만일 그 율법을 어겼다면 죽음이라는 죄값을 받는 것이 너희가 알고 있는 율법 아니냐? 그런데 내가 말한다.” 즉 살인에 대한 율법을 완전케 하시겠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여야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율법인데, 주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살인하는 것은 똑같다는 거예요. 분노를 품는 것은 즉 살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분노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체계는 우리의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우리의 생각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상범이라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 사상체계가 그 사회에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제로 그 사상 자체를 금지하는 법을 일부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형사에 관한 법은 우리의 행위를 다룰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다면 법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고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한 상태만 가지고는 죄가 성립이 되지 않고 벌을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마음 속으로 죽이기로 하고 미워하고 화를 냈어도 실제로는 그 대상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행위만을 통제하는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영혼이 정결케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율법을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만 한정시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내신 하나님 자신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내가 준 율법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주님 말씀이 이거 아니에요?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으로 보면 형제를 미워하고 그에 대해서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죄도 되지 않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미 살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피를 흘리고 치고 박고 싸우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라는 계명이란 말이지요.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공회에 잡힌다는 것 역시 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살인죄라는 것이지요. 라가라는 말은 바보, 멍청이라는 뜻입니다. 또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바보 멍청이라는 말은 우리 기준으로 보면 욕도 아닙니다. 사실 그만큼 우리의 언어 속에 심한 욕설이 많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참 우리 한국 사람들은 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욕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는 뜻 아닙니까? 뭐 예쁘고 좋아서 욕한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욕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증오요 분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실제로 칼로 형제를 찔러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에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이 그렇다는데,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논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분노나 증오, 범죄를 감추고 얼마든지 눈에 보이는 선행과 종교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는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곱게 치장하고 화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요.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칭찬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방법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안 통한다는 거예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 드리는 것 중단하고 먼저 가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한 후에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형제에게 못할 짓 해놓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안 받으시겠다는 거예요. 그런 제사 백번 드려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못할 짓 해놓고, 형제를 증오하고 그에게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 즉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하는 죄를 저질러 놓고, 즉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종교적인 의무,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외면의 형식과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완전케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업현장에서 사용자가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것이 흔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큰 공장을 운영하면서 어린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원망들을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교회에 가면 장로요, 재정위원장, 선교위원장 같은 중요한 직책도 많이 맡고 헌금도 많이 하고, 그래서 존경도 많이 받겠지요? 믿음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에 갇혀서 속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기준으로 재고 적용하면서 그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자와 길에 함께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는 말씀은 그나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군요. 길에 함께 있다는 것은 시비를 가리기 위해 법정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 9:27).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이지요. 오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마음 속으로 살인하고 있는 죄를 깨닫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칼로 찌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몰라서 구원을 얻지 못했었다면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분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형제 자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음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거짓과 미움의 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숨어서 죄악을 즐기는 안전한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음 속의 살인이 얼마든지 용납되고 허락되지만, 우리 주님이 완전케 하시는 율법에 의하면 마음 속의 살인이나 마음 밖의 살인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의 시민들은 마음 밖의 살인만 저지르지 않으면 모범시민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 속의 살인까지 저지르지 않아야만 하나님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기준에 맞추어 놓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에 따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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