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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맹세 (마 0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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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맹세 (마 5:33-37)

우리가 살면서 참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경우 중 하나는 아무도 나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을 때입니다. 특히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훨씬 더 많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어서 종종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합니다. 참 슬픈 일이지요. 또 결백을 입증하지 못해서 죄없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누명을 벗고 풀려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백이 입증되었다 한들 이미 죽은 목숨을 되살릴 길이 없고, 흘러가버린 세월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진실과 결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목숨과 명예, 그리고 수많은 세월을 빼앗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건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인정받지 못하면 명예를 잃게 되기 때문에 그 잃을지도 모르는 명예를 담보로 해서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고 주장하고 선언하는 것이 맹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거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이 쉽게 명예나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맹세를 하면 그 하는 말이 좀더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맹세를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맹세가 남발되다 보면 그렇기도 하겠지요. 또 명예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맹세를 해도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보다 더 진실하고 권위있는 대상을 찾아서 그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진실을 보증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는데, 이 번역은 상당히 다른 의미로 읽혀지기 쉽습니다. ‘망령되다’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은 문제지요. 원래 이 세 번째 계명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잘못 부르거나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하고 맹세를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 속상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니까 사람들이 믿어준단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만 대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남발되고 잘못 사용되겠어요? 나중에는 매우 악하게 사용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곤란한 입장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군사정권 시절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학생운동하는 여학생을 잡아와서 심문을 하면서 성고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혐의를 받은 경찰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교회 집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즉 이것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기독교,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 경찰관은 성고문한 사실이 인정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었단 말이죠. 바로 이런 경우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세 번째 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언급하시는데,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맹세,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한 세 번째 계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율법 자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율법에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한 규범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민 30:2). 이것은 하나님께 약속을 했거나 또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과 약속을 했을 경우 마땅히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우습게 본다는 뜻 아니겠어요?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면서 하나님을 보증인으로 세웠는데 그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약속의 보증인이 된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즉 구약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또 그것을 지키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 계명을 확장 해석하시면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맹세는 매우 불완전하고 거짓된 것일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요? 예수님이 붙잡혀 재판을 받고 능욕을 당하시던 밤, 주님이 걱정되어 거기까지 몰래 따라 들어갔던 베드로는 사람들 틈에 끼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나가던 사람이 “당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저 예수의 한패거리 아냐?” 하는 것입니다. 기겁을 해서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얼른 다른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의 한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그랬는데도 조금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이 친구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것 보니까 예수의 패거리인 게 분명해.” 이러는 겁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했어요. 저주했다는 것은 만약 자기가 예수의 패거리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성질이 좀 급하고 앞뒤 재지 않는 신중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성품이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처한 상황이 급하다 보니까 이렇게 악한 맹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라고 다를 게 있겠어요? 정말 억울함을 풀 길이 없어서 맹세를 할 수는 있을진대, 누구나 이렇게 맹세를 할 수 있다면 정말 억울한 경우라 하더라도 누가 그 맹세를 믿어줄 수 있겠어요? 물론 거짓 맹세하는 것과 진실한 맹세는 차이가 있고 잘 살펴보면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그렇다면 뭐 하러 굳이 맹세를 합니까? 맹세를 하지 않아도 진실이 드러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사람이나 몹쓸 짓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얼굴 들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할 게 아닙니까?

재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서로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고 우기니까, 조사를 하고 수사를 해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밝혀내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계속하니까 수집된 증거를 근거로 해서 누가 가짜 맹세를 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말을 진짜처럼 잘하느냐에 따라서 그 판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겠네요.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를 늘 체험하면서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만 불리해도 쉽게 거짓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모자라서 맹세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를 해도 하나님의 이름까지 팔아서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화가 나시겠어요?

맹세는 뭔가를 걸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걸어야 할 것이 마땅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럼 하늘을 걸고 하는 것은 괜찮을까요? 우리가 종종 ‘하늘에 맹세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에 하늘에 걸고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어 맹세를 하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땅을 걸 수도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땅에 발을 걸치고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곳이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땅도 결국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이 거하는 성,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책임 아래 있는 거룩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걸고 맹세하면 되겠군요. 그래서 자신의 머리를 걸고 맹세하면 괜찮을까요? 자신의 머리를 건다는 것은 명예, 심지어는 목숨을 건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머리를 걸고 맹세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내 머리라 할지라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머리카락을 희거나 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관할에 속한 것이라는 말이죠. 내 머리, 내 목숨이라 할지라도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소유권보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소유권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까 설령 내 머리를 걸고 맹세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에 근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했습니다. 우리가 맹세를 하는 것까지는 뭐 상관없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권위를 우리의 가치없고 불안정한 맹세에 빌려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습니까?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이처럼 맹세 자체를 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맹세를 하고 삽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심지어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도 있어가지고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여 그것을 암송하곤 했었습니다. 법정에 가면 선서를 한다거나 결혼식에서 서약을 하는 것이 모두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지금도 일체의 서약을 거부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규범과 법질서를 위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도 시민권을 얻으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법과 질서를 지키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감옥에 가는 것을 불사하면서까지 모든 서약을 거부하는 것은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겠군요.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가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옳은 것이면 그냥 옳다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됩니다. 거기서 지나는 것, 즉 맹세를 하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게 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는 것이다, 즉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집사인데 어떻게 성고문 같은 악한 일을 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악하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입니까? 거짓말을 하더라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면 됐지 왜 하나님을 거짓말하게 만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설령 진실을 말하는 경우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면서까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자꾸 아니라고 강조하는 경우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인 수가 많습니다.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위장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거창하게 맹세씩이나 하면서 사실을 부풀리고 거짓을 감추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맹세를 했다고 지키고 맹세를 하지 않은 약속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작은 약속에도 성실하고 말 한 마디라도 정직하게 행할 때, 우리의 말이 권위를 갖게 되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빙자해서 정직하지 못한 우리의 마음이 정직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직함이 인정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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