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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은 달콤한 사탕처럼 (마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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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은 달콤한 사탕처럼 (마 6:1-4)

20세기에 들어와 미국을 중심으로 철학과 교육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조는 실용주의입니다. 실용주의란 쉽게 말해서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였던 관념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진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념이 어떤 눈에 보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관념은 진리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러한 사조는 무엇이든지 쓸모 있는 것, 즉 유용한 것이 진리라는 사회적인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쥐 잡는 것이 고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양이 그럴듯해도 쥐를 잡지 못하면 그것은 고양이라는 관념에 위배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생긴 것은 토끼같이 생겼어도 쥐를 잡으면 고양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있던 중국이 개방을 시작하면서 채택한 노선이 바로 이 실용주의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실용주의는 전통과 의식에 매여 있던 사회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개발이 늦어졌던 동양권에서 보기에는 서양의 실용주의야말로 풍요와 발전을 이룩한 원동력으로 간주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전통에서도 보면 체면치레 때문에 실속을 챙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 아닙니까? 그래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의 채택이야말로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요인으로 인정되고 추구되었습니다. 또 이 실용주의적 사고는 자본주의의 생리와 딱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경제개발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 우리는 결과지상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밤새워 공부를 했어도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그 노력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코피 쏟으며 공부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필요한 것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험 결과인 것입니다. 정직하게 기업하다가 부도가 나서 망해버린 사람과, 탈세도 적당히 하고 뇌물도 쓰면서 매출을 많이 올리면서 사업을 번창시킨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결과지상주의의 사고에 의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으로 장학사업도 하고 가난한 사람도 돕고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한 사람이 사회에 공헌을 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반면에 사업에 망해버린 사람은 아무런 공헌도 못했고 누구도 도와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도를 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으로 간주되기까지 합니다. 결과론에 의하면 정직한 사람은 비난을 받게 되었고, 탈세와 뇌물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은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보세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결과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사람의 속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이 우선적이고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거든요. 겉으로 드러나고 치장한 것이 아무리 요란하고 아름다워도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보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마음 속에 형제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살인과 동일하다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음욕을 보시고 그것은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다른 사람 보기에 정말 아름답고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지만 그 마음 속의 동기가 겉으로 드러난 선행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는 인간이 보기에는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결과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는 전혀 칭찬받을 일도 착한 일도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구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구제야말로 우리 인간이 시행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선행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잘살게 하시든가 똑같이 못살게 하셨으면 구제라는 것이 우리의 주요한 의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똑같이 잘살거나 똑같이 못사는 상황이라도 우리 인생살이에 애경사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애사를 당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행위가 필요하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잘사는 사람도 있게 하시고 못사는 사람도 있게 해 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의 의로움을 시행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상자를 의로움의 상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행할 수 있는 의로움이 뭐겠어요?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 아닙니까? 엊그제 뉴스에 보니까 영등포 역에서 열차가 들어오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철로에 떨어질 뻔한 것을 역무원이 달려들어 구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철로에 떨어져서 두 발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정부에서는 그 사람을 의인으로 추서하고 훈장을 주기도 합니다.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것은 의로운 행위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또 자주 있는 일도 아닙니다. 자주 있어도 안 되겠지요. 우리가 손쉽게 행할 수 있는 의로운 행위는 주로 구제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제를 한다는 것은 그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 남는 돈을 쪼들리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라는 것은 먹지 못해서 당하는 고통,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병들고 연약해진 육신으로 겪어야 하는 아픔, 의지할 데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슬픔, 이런 것들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누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구제는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같은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라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나누어지려는 것이 바로 구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 기름이 낀 부자가 그저 사회적 체면이나 어떤 의무감에서 구제성금을 내는 것은 구제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구제행위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기부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돈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겠군요. 그러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고통을 나누고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이 구제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구제를 많이 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고통이 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슬픔을 당해 보았기 때문이지요.

어느 사회복지사가 정부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구걸로 연명하는 한 아주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가 막히더라는 것입니다. 얼굴 한 쪽은 화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고,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구멍만 두 개 뚫려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나 다른 식구는 죽고 아버지와 자기만 살아남았는데, 그때 생긴 화상으로 온 몸이 흉하게 일그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딸을 때렸답니다. 아버지도 얼굴이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집을 뛰쳐나왔는데, 갈 곳이 있나요? 고아원에 가면 아이들이 놀리고 때리지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다가 부랑자 보호시설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 몇 년 지내다가 시각장애인과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는데, 남편은 딸이 태어난 지 얼마 후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전철역에서 구걸하는 일이었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무료로 성형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러 번의 수술로도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수술만 하면 얼굴이 좋아져서 웬만한 일자리라는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더 깊은 절망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면담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이 아주머니가 장롱에서 뭔가를 꺼내 주더랍니다. 검은 비닐봉지에 묵직하게 싼 것이 뭔가 하고 풀어보았더니 100원짜리 동전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이게 뭐냐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 약속한 게 있습니다. 구걸하면서 1000원짜리가 들어오면 생활비로 쓰고, 500원짜리가 들어오면 자꾸 시력을 잃어가는 딸아이 수술비로 저축하고, 그리고 100원짜리가 들어오면 나보다 더 어려운 노인분들을 위해 드리기로요. 좋은 데 써 주세요.”

구제를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제 안 하면서 천국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한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요,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구제하는 행위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구제를 하게 되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를 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알리고 싶은 유혹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KBS에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모금을 위해서 모금하는 것을 생중계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동안 돈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길게 줄을 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로움의 상자라고 하는 구제상자에 돈을 많이 넣었습니다. 회당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그렇게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많이 냈단 말이지요.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얼마나 칭찬을 했겠어요? 그런데 주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그래, 잘했구나. 사람들이 칭찬을 다 해버렸네. 그 선행에 대한 상을 다 받았으니 내가 줄 상이 없구나.”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상을 주시려고 했는데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바람에 하나님의 상급이 취소되었다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제와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상 주시려고 하신 선행이라면 어쩌다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어도 역시 하나님이 큰 상을 남겨놓으실 것입니다. 흉측한 얼굴 가지고 구걸밖에 할 것이 없는 비참한 인생을 살면서 100원짜리 모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 돕겠다는 거지 아주머니의 선행이 남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알아버렸으니까 하나님이 상 주시려는 것 취소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선행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선행입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겠어요? 그러나 선행했다고 나팔을 부는 사람과 왼손이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선행하는 사람, 누가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행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결과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고아의 동전 두 닢이 부자들의 금화보다 훨씬 더 많이 헌금한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행을 하고 나서 자신이 기특하게 생각되고 나아가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해버리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 즉 영적 교만이야말로 패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좋은 일하고 나서 망해야 되겠어요? 뭐하러 착한 일을 하고 버림받아야 합니까? 이처럼 선행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도록 하는 장치인 동시에,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또한 자기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위험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선행에 대한 동기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교만에 빠지고 마치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하는 구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는 말씀, 얼마나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착한 일을 하고 나서 칭찬받고 싶은 유혹, 유명해지고 싶은 유혹, 정말 달콤하게 우리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보시고 상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그 유혹도 이겨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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