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골방으로 들어가라 (마 06:5-8)

첨부 1



골방으로 들어가라 (마 6:5-8)

세상에 독불장군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한 것처럼, 설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서 일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데, 하물며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 아닙니까?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보다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나에게 없는 것이나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관계는 모두 이처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도움을 구해야 하는 관계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그렇다면 하물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겠습니까? 매우 제한된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고 수많은 한계에 봉착하며 사는 인간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절대자 하나님을 대할 때는 기본적으로 무슨 관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무조건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말할 때 이처럼 도움을 구하는 행위에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도움을 구하는 기능 외에도 더 중요한 수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구한다는 한 가지 측면에서만 봐도 기도라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즉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기도의 본질은 첫째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리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통만 붙잡으면 금방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바로 곁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듯이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통신수단으로서 기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화기만 들면 멀리 있는 사람과 연결되듯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즉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근거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해서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와 존재의미는 모두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하나님의 울타리 밖에는 생명도 없고, 하나님과 상관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마치 우리는 식물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 것처럼, 하나님께 속해 있고 연결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과 존재의미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래서 기도를 영적인 호흡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금방 목숨이 끊어지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삶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적인 호흡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식물이 뿌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생명의 근원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영적 삶의 근원과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했습니다. 숨쉬는 것을 쉴 수 있습니까? 기도 역시 그 본질상 쉬었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의 창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고 낙심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늘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요로에 있는 사람에게 청탁을 해서 겨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엎드려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기도하는 것이 귀찮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세요? 아니에요,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인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접근가능성(accessibility)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것이 바로 기도로 가능한 것이잖아요?

교회가면 맨날 기도하라고 귀찮게 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만 반대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절대로 기도를 못하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그야말로 우리는 숨이 막혀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그의 대적들이 그를 올무에 빠뜨려 제거하려고 한 달 동안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왕의 조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젊었을 때 전쟁포로로 잡혀와 지금까지 살면서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던 다니엘로서는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굴에 던져지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도했어요. 지금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발각되면 붙잡혀서 고초를 당하는 지역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골방이나 토굴 같은 곳에 숨어서 남몰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기도이겠습니까? 기도는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힘든 일도 아니에요.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는 정말 소중하고 귀중한 축복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특성 때문에 기도는 신자의 삶에서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종교적 의무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즉 기도의 부재는 올바른 신앙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접근하게 되면 기도의 유무와 정도에 따라서 한 사람의 신앙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작용하지 않겠어요? 즉 자신의 기도 열심히 하는 경건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런 곳에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회당이야 종교적 행사가 시행되는 곳이니까 당연히 기도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길거리 모퉁이가 기도하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지만 거기서 기도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고 왕래가 많은 곳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그들의 동기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 한 얘기의 중점적인 내용은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회당과 길거리 모퉁이에서 기도한 바리새인들은 결국 누구에게 기도한 꼴입니까? 사람들에게 기도한 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요즘에는 그런 현상이 거의 없어진 것 같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하는 장로님들은 기도를 엄청나게 오래 했습니다. 목사님 설교 시간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렸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어요. 기도를 오래 해야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래야 하나님이 들으실 줄로 생각했을까요? 주님은 말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말이죠. 또 기도하면서 온갖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기도하는 분들도 많지요? 목소리까지 약간 떨면서 말이죠. 결국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사람 들으라는 기도입니까?

여기서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골방은 조용하고 은밀한 곳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거나 또는 방해받을 일이 없는 곳이지요. 거기에는 오직 나와 하나님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니까요. 기도의 골방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히지 않고 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골방을 갖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은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자, 그럼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고 하셨으니까 사람들 모이는 곳에서는 기도 안 해야겠다, 새벽기도회도 나가면 안 되겠고, 철야기도회도 안 나가고, 무슨 기도모임이든지 없애는 것이 좋겠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실제로 그런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위험한 생각이지요. 사람은 이중적인 삶을 사는 쉽지 않습니다. 기도의 골방을 가지고 늘 기도하는 사람이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서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기도모임에 반대하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고, 집에서 온전하면 밖에서도 온전한 법입니다.

또 주님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언부언은 똑같은 말을 의미없이 반복하는 행위입니다. 주문 외는 것이 되겠군요. 똑같은 말이라도 계속해서 반복하면 하나님이 더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귀가 어두우시다면 알아들으실 때까지 반복해야겠지요.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보세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귀가 어두우셔서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도 아니고, 기억력이 좋지 않으셔서 금방 잊어버리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안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벌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뭐 하러 기도를 하지요? 기도하기 전에 아신다면 말이죠. 얘기가 더 복잡해지네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벌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몰라서 구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면 억지로라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니까 괜찮다고 했어요.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대하지 않았어요. 포기했어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것도 그냥 립서비스인 줄 알았단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주시잖아요. 하나님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기도했다고 다 주시는 것도 아니고, 몰라서 기도 안 했다고 안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해도 안 주시는 경우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기도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아들을 낳고 싶지만 하나님 생각에는 아들 주실 마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기도해가지고 하나님을 설득시켜서 아들을 얻어내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더 중요한 목적은 아들 안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 열심히 해가지고 아들 얻은 사람들 많이 있어요. 한나도 그랬고 리브가도 아들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했었지요. 그런 경우를 보고 우리는 믿음으로 아들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안 주실 작정이었는데 자꾸 기도하니까 할 수 없이 아들을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나타나요. 하나님께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그런 형식으로 된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올바로 하는 것인지 가장 좋은 본보기는 우리 주님의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아버지여, 이 십자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내가 안 지면 안 되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렇지만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과 자아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기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기도하게 될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올바로 서게 될 것이고, 또 그것은 우리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