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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을 향한 기도 (마 0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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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향한 기도 (마 6:9-15)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율법을 요약하셨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관한 것과 우리 자신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또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 앞부분의 기도가 하늘을 향한 기도라면, 이제 기도의 뒷부분은 땅을 향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놀랍게도 우리의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를 위한 기도에서 맨 처음 구할 것으로 먹는 것을 말씀하셨을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먹을 것을 달라는 기도는 우리의 생존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서 먹는 음식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음식뿐인가요? 우선 당장 공기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또 물이 없다면 우리가 몇 시간이나 견딜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우리의 생존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존재,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강하심과 부요하심에 의지하게 될 때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곳이 어디인가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유혹, 그것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매우 매력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의 시작이었습니까? 인간은 애초에 창조되기를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본질과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고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먹는 음식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일해서 돈벌었고, 내가 수퍼에 가서 쇼핑해왔고, 내가 밥을 하고 요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제 친구 목사님 한 분이 설교시간에 한 얘기가 참 우습기도 하고 의미도 있어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쌀을 주시면 쌀밥을 먹고, 라면을 주시면 라면을 먹고, 아무것도 안 주시면 굶어야 합니다. 불만 있습니까?” 우스개 소리 같긴 하지만 사실이지 않습니까? 내가 쌀 사다가 밥을 했지만, 하나님이 안 주시면 우리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유럽에서는 폭염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를 조금만 덜 내리시거나 조금만 더 내리셔도 우리의 양식 조달에 막대한 차질이 생깁니다. 광우병이나 구제역 같은 재앙이 내리면 우리의 먹을거리에 비상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기도입니까?

물론 우리가 먹을 것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입을 것과 쓸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살 집이나 자동차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일용한 양식이라는 말은 오늘 하루 먹을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즉 사치품이나 일용한 정도를 넘는 것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가 일용한 양식이고, 어디서부터는 사치품에 들어갈까요? 부자의 기준과 가난한 사람의 기준이 다를 것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은 그야말로 그 날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일 수 있겠고, 부자는 생일선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시라고 기도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의 아주 좋은 본보기는 잠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잠언 30장 8-9절에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자라고 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물론 당장 먹을 것이 급한 가난한 사람의 기도와는 다르겠지요. 그러면 먹을 것이 충분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장 먹을 것이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먹을 것 충분하다고 다른 사람들 굶는 것 상관하지 않는 사람은 이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먹을 것 걱정이 없는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이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그 날의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날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맛본다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범죄하고 넘어집니다. 그렇게 범죄한 것들을 쌓아놓고 산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하지 못하고 고통과 스트레스 속에서 사는 수가 많은데, 그 이유는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를 경험했을 때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따라서 우리의 기도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군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랬으니까요. ‘하나님, 내가 나한테 잘못한 아무개를 용서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요건처럼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렇게 읽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를, 이웃을,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또 받은 우리에게는 이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의무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는 백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나는 정작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되는 것이지요. 매튜 헨리는 말하기를,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나를 결코 용서해 주지 마십시오’라고 자신을 저주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20세기 초 영국 웨일즈 지방에 커다란 부흥운동이 있었는데, 이 부흥은 한 작은 교회의 부인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주기도문을 하다가 중간에 그것을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열심히 하던 교회봉사도 중단했습니다. 예배도 중단했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드리는 기도와 봉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그 미워하던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우리의 갈등은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라고 그 여자는 자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부인의 회개를 시작으로 그 교회 속에는 부흥이 일어났고, 그것은 웨일즈 지방 전체에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불길로 타올랐던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상처는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증오와 분노가 샘처럼 끊임없이 솟아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을 때, 나 같은 악하고 못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았을 때, 나 역시 나를 파괴시킨 사람,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원수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하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를 누리고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또 하나 더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시험으로 끌고 들어가 넘어뜨리는 것은 사탄이 하는 짓이지요. 우리가 멍청하게 있다가 마귀의 꾐에 넘어가 당하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해서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 마음속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는 자꾸만 넘어지고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아요?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했어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하는 마지막 문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입니다. 기도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내용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우리가 첫 부분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이미 언급했던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했잖아요?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는 ‘모든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유익한 기도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중한 기도를 의미 없이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수가 많습니다. 어떤 독일인 교수 한 분이 일본을 방문해서 몇몇 대학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강연을 마친 후 그 강연에 참석했던 한 학생이 그 교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기도를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보통 얼마동안 기도를 하십니까?”
“짧게는 10분, 좀 길어질 때에는 30분 정도 합니다.”

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시기에 그렇게 시간이 걸립니까?”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합니다. 어떤 때는 30분도 짧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평소에 아무런 의미 없이 재빨리 주기도문을 외우고 지나쳐버립니다. 그러나 그 말씀 하나하나를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가 임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놀라운 은혜를 늘 체험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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