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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마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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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던 일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구석구석에서는 제대로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오늘 우리에게 또한 이웃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것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있으면서도 먹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금식이지요. 특히 금식은 종교적 행위로서 시행되는 수도 경우가 많습니다. 이슬람에서는 금식이 다섯 가지 기둥, 그러니까 신자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기본구조의 하나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간인 라마단이 되면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침도 삼키지 않고 뱉어냅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주로 중동의 사막이나 아프리카 같은 더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 아래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금식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에서는 왜 이런 육체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스스로 고통을 가함으로써 얻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금식은 금욕의 한 가지 모습입니다. 중세 시대의 가톨릭에서는 고행이 구원을 향한 순례자의 주요한 덕목으로 제시되었지 않습니까? 고행, 금욕, 금식, 모두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고, 영혼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 반면에 육체는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영혼이 육체에 붙잡혀 있는 비극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 육체가 추구하는 쾌락에 대해서 매우 대조적인 두 가지 견해가 발달되었습니다. 하나는 스토아 학파라는 금욕주의입니다. 육체는 악하고 방종한 것이기 때문에 괴롭게 해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더 많은 악을 생산해낼 뿐이고 영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쾌락을 금지시키고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이요 미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악한 육체는 구원받을 수가 없고 이 육체의 목숨이 끝나는 날 영혼은 자유롭게 되어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육체를 선하게 계몽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무슨 짓을 하든 영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영혼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나누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과 혼과 육의 세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서로 틀렸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두 가지나 세 가지의 구성요소로 나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을 나누려고 할 때 금욕주의나 쾌락주의 같은 매우 잘못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도적질을 했을 때 육체만 범죄했고 영혼은 그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마음의 간음을 했을 때 영혼만 범죄했고 육체는 깨끗하다고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전체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성경적이고 유익한 사고방식입니다.

어쨌든 금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한번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합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결혼식 잔치하면서 손님들에게 금식하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때 금식해야겠지.”

결혼식은 기쁨과 축하의 잔치를 동반합니다. 즐겁게 먹고 마셔야죠. 그 잔치 한 구석에서 금식한다고 버티는 것은 그 결혼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혼으로 인해서 속이 상하고 괴롭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 결혼잔치 분위기를 해치게 되고 따라서 거기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납치를 당하거나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면 신부를 비롯해서 모든 손님들이 울면서 슬퍼하겠지요? 그럴 때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겠어요? 이때야말로 슬퍼하며 금식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다들 울며 금식하는데 한 구석에서 ‘아이구 잘 됐다’ 하면서 먹고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몰매를 맞고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슬픔과 고통의 외적인 표시라고 할 수 있겠군요.

구약 성경의 기록에서 보통 어느 때 금식을 했는가 하면 큰 슬픔을 당했을 때입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백성들이 그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지낸 후에 7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도 금식이 선포됩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성은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하고 회개했습니다. 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 금식을 했습니다.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는 모든 유다 인들과 더불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금식은 큰 위기가 닥쳐왔을 때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조차 없을 때 금식합니다. 이 때의 금식은 ‘나는 죽은 목숨이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범죄해서 회개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죄인이요, 그래서 밥을 먹을 자격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기대기 위해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금식입니다.

삼국지에서 촉나라가 망할 때 후주 유선은 삼베옷을 입고 자신의 몸을 꽁꽁 묶습니다. 그리고 상여를 타고 위나라에 항복을 하지요. 항복하러 가면서 황제의 의관을 갖추고 뽐내면서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황제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의미로 몸을 꽁꽁 묶고, 이제 죽은 목숨이라는 뜻으로 상여를 타고 가서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은 성도의 삶에 매우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로서 매우 장려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금식이 종교적 행위로서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다 보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경건하고 또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또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과 자기부인의 거룩한 투쟁은 자연히 금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늘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삶 속에서 종종 금식이 병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식 자체가 경건한 삶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경건하게 사는 척하기 위해서 일부러 금식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야말로 가증한 일일 뿐이지요.

금식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금식한다고 자랑하는 것은 ‘나는 밥을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입니다’ 하고 떠드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금식하는 것은 ‘나는 죽을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내야 합니까?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뭐 하러 사람 앞에서 나팔을 부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행태야말로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 앞에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그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해악 역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은 금식할 때는 깨끗한 몸으로 해야 한다고 해석하는데, 주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금식을 무슨 비밀공작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하란 말이지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금식도 사람들 앞에서 나팔불면서 하지 말고 하나님께 은밀히 하라는 것입니다.

구제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 그리고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동일합니다. 구제, 기도, 금식, 모두 성도의 삶에서 마땅히 시행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행하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겨워하시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행함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경우입니다. 종교적 행위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종교적 행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사 1:11-13)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7]. 참 마음으로 하는 회개입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금식기도원에 들어가서 일주일 금식에 도전해야겠다.” 왜 일주일 금식을 해야 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40일 금식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뭐냐? 최소한 일주일 금식은 해야 체면은 서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내가 집사이고 장로인데... 이런 식으로 하는 금식,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쓸데없이 금식하는 것 정말 쓸데없는 짓입니다. 정말 금식할 일이 있으면 그때 금식해야지요. 그것도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굳이 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금식한다는 것은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것이니까요.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송 작곡자의 매우 방탕한 가정생활과 악한 불륜행각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어 결국 그가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은혜로운 찬양을 만들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게 했던 사람이 그토록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씁쓸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가증하고 더러운 속마음과는 달리 거룩하고 아름답게 겉모양을 치장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얼마나 몹쓸 짓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범죄하는 것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속에서 일어난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범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행과 종교적 의무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에서 진심으로 행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참으로 내면의 아름다움과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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