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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와 행복 (마 0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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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와 행복 (마 6:25-34)

옛날 우리 조상들의 덕목 가운데 하나는 청빈이었습니다. 특히 청빈은 관리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관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청빈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악인의 대표적인 표상이 탐관오리 아닙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 악인의 상징이지요. 변사또 같은 인간입니다. 실제로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의 폭정은 민중의 집단적인 저항을 초래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탐관오리에 대비되는 표상이 바로 청빈한 선비입니다. 비 오는 날이면 지붕이 새는 그런 집에서 살았다는 황희 정승 같은 분이 한 예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빈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는 욕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덕적 표상으로 제시되는 모델은 쌀독에 쌀이 떨어졌는지 어쨌는지 관심도 없고, 또 떨어졌다 한들 걱정도 하지 않으면서 책이나 읽는 선비입니다. 남편이 그 모양이니 그저 죄 없는 아내만 속이 탈 뿐이지요. 옛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치관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삶의 행태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듯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사실 요즘 우리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입는 거야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좀 있을 수 있겠지요. 오천 원짜리 시장표 티셔츠 입는 사람과 이십만 원짜리 명품 티셔츠 입는 사람의 차이는 심각할 정도 아닙니까? 그러나 비록 오천 원짜리를 입을망정 헐벗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명품을 못 입어서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 먹고 살 만하게 된 우리에게는 이제 이 말씀이 구속력을 상실한 것입니까?

질문을 한 가지 더 해봅시다. 그럼 아프리카처럼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 말씀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와 다른 것일까요?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굶어 죽어도 찍소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까? 겨우 거적때기 하나로 몸을 덮고 한겨울을 길거리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그렇게 곤란한 처지에서도 뭔가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고 그냥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가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오늘 먹을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입만 벌리고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는 먹을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으면서 이제 와서는 먹을 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25절 처음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는 접속사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바로 앞에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돈의 대비가 여기서는 먹는 것, 입는 것 vs 목숨, 몸의 대비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쌀독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고 걱정도 없는 선비처럼 되라는 말씀도 아니고, 당장 굶어죽는 사람에게 아무 염려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면 하나님이 먹여주신다는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좀 헷갈리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헷갈리지요? 먹을 것 염려하는 것은 목숨 때문인데, 목숨이 더 중요하니 먹을 것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거든요. 입을 것 염려하는 것도 몸을 위한 것인데,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니 입을 것 염려하지 말라는 것도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 헷갈리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수님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말씀을 한번 살펴봅시다. 2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경 좀 쓰면 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치고 고기도 볶고 해서 식탁이 풍성해질 수 있고, 귀찮아서 대충 먹게 되면 김치 하나 놓고 밥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또 마음먹기에 따라서 오천 원짜리도 아무렇지 입고 다닐 수도 있고, 기어이 명품을 입어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 말씀처럼 음식보다 목숨이 훨씬 중요하고, 옷보다 몸이 훨씬 중요하지 않습니까? 오천 원짜리 입고 다닌다고 몸이 축나고, 명품 입었다고 몸이 날아다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기 먹는다고 목숨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채소 먹는다고 목숨의 가치가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아요. 물론 먹는 음식에 따라서 삶의 질을 얘기할 수 있고 또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있겠지만, 여기서 주님은 그런 것을 논하려고 이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논지는 우리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들 때문에 염려하지만, 우리의 목숨과 몸을 관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위해서 음식을 먹지만 그 목숨 하나님이 관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위해서 우리가 음식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말짱 헛수고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몸을 위해서 좋은 옷 입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몸을 관할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몸을 위해서 명품 입으려고 수고해서 염려하는 것도 전혀 효력이 없는 헛된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 좋은 의복을 위해서 애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행위, 즉 재물을 섬기는 행위와 동일시됩니다. 그리고 재물을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즉 목숨과 몸에 관한 문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우리의 목숨과 몸을 관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란 하루아침에 뚝딱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한번 작정하고 결심한다고 해서 삶이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말씀을 상고하고 반복해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늘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샘플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입니다. 우리는 은행에 잔고가 많지 않으면 근심이 늘어나지만, 공중의 새는 은행구좌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 없이 잘 삽니다. 들의 백합화 역시 화장도 하지 않고 명품도 사 입지 않지만, 역사상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고 말해지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못했다고 주님은 평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염려와 노력, 모든 능력 다 합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새 발의 피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삶일까요? 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예수님의 대안 제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이 교훈을 시작하셨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의 결론은 우리 인생이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고, 보물을 땅에 쌓고, 잘 먹고, 명품 고집하고, 좋은 집과 좋은 자동차, 그리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멀리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는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정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뭐라고 하셨어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뭐예요? 우리가 주기도문 부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나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는 저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 박사 같은 분들의 삶을 무슨 전설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우리의 삶에서 그런 모습이 나타나기를 우리 주님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될 때, 먹는 것, 입는 것, 부자가 되는 것, 이런 것들은 이차적인 가치, 상대적인 가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을 때 이것을 가상히 보신 하나님께서 부귀와 영화를 덤으로 주셨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에게 부귀와 영화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덜 중요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대가로 보너스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은 보너스, 별로 원치 않는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참으로 누리는 행복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방인들은 행복만을 추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돈이 많아야겠지? 예쁜 아내를 얻어야겠지? 공부를 많이 해서 Ph.D를 따면 행복할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매우 제한되고 한시적이며,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원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복을 추구하거나 누리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내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 사람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미래를 보장받았는데 내일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인생이라는 게 결국 늘 내일 걱정하면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일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행복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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