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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의 미학 (마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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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미학 (마 7:1-6)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성품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려고 애를 쓰고 그래서 늘 부드럽고 따뜻한 말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만.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 들추어냅니다. 왜 그렇게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쳤는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는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우리가 많이 듣는 말 중에 예수 믿는 사람치고 말 못하는 사람 없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을 잘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해 많이 듣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때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믿음이 좋다는 분들 가운데서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혼자서 온 세상을 바로잡아야겠다는 듯이 열을 내며 사사건건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비난하는 데 특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수가 많아요. 또 교회의 지도자라는 분들이 비난받을 짓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잘못하는 교회나 지도자들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저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하는 얘기를 들으면 속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뭐 밖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난하는 것은 괜찮아요. 그 말이 맞으면 수긍할 수도 있고 또 필요하면 같이 맞붙어서 싸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이 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비난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그 비난은 정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런 비난에는 교회를 향한 애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애정을 깃들인 비판과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아주 다르거든요. 애정을 담은 비판은 비록 혹독할지언정 그것은 자신을 향한 고통스러운 비판이고, 비록 교회가 문제투성이망정 함께 안고 가야 할 내 교회라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비난에는 증오가 숨겨 있습니다. 그렇게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이제 너와 나는 영영 결별이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렇게 결별에 다가갔다면 이미 비난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판으로는 결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카운슬링에서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비판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마음으로 카운슬링을 해서는 치유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삶이나 행동을 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의심스러울 때가 많지 않던가요? 사실 그렇게 남을 비난하고 세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면 충분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혼동되는 경우입니다. 자신에 대한 불만이 세상을 향한 분노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분노가 다른 대상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향한 비난과 공격을 많이 하게 됩니다.

또 다른 한 가지 경우는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오류와 결점을 정당화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입니다. 자신이 나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잘못도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너는 더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동원되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변호하는 행위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양심도 없는 인간이라는 굴레를 더 뒤집어쓰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투영되어 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실 차가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주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이 사실은 이기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뭔가 잘못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남을 비난하게 되고, 그렇게 남을 비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더욱 강조하고 확인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을까요? 그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큰 잘못을 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이라도 잘 찾아내는 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작은 잘못은 그렇게 잘 보이는데 자신의 큰 잘못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담대하게 남을 비난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의 눈 속에는 커다란 통나무가 들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고 설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도 없고 용납되지도 않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나 하겠어요? 누가 이런 사람을 인정하겠어요? 그렇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인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는 일이 효과적이지도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수법이었습니다. 아주 곤란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 편을 들었거든요.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고 말씀하셨거든요(눅 5:32). 돌로 치지 말라고 하자니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치라고 하자니 지금까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견지하셨던 입장과 다른 것이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이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모두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나왔던 사람들 중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보다 더 깨끗하고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도 거기 왔던 사람들은 양심이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들이군요.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만약 오늘 이 사회에서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서로 먼저 치려고 했을 것이라고요. 왜냐하면 돌로 치지 않는 것은 자기도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로 큰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세라고 해야겠군요.

이처럼 비판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비판의 본질은 질투와 악한 성품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은 첫째로 우리 자신이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는 그러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여기서 사도 바울이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각자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잘하면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이고 잘못하면 하나님이 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제를 판단한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가로채서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 역시 같은 얘기를 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정당한 비판의 기능을 무시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를 바로세우고 우리 가운데 죄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듯한 자기반성도 필요하고, 마치 자신의 수족을 찍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판을 형제에게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매우 소중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준다는 것은 거룩한 고기, 즉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고기를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개가 그것을 압니까? 개한테는 그 고기가 거룩한 고기인지 그냥 고기인지 아무런 구별도 없고 상관도 없습니다. 마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에게는 진주 목걸이가 필요 없어요. 오히려 돼지는 먹지도 못할 것을 주었다고 화를 내고 주인에게 달려들어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인 줄 모르고 값진 것을 값진 것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줄 필요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약이 됩니다. 여기서는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비판을 받는 입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정말 소중한 친구라면 쓰디쓴 충고도 할 수 있는 사이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면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 자기 잘 되라고, 잘못된 것 고치고 올바로 되라고 충고와 비판을 하는데 그것을 못 받아들이고 기분나빠하고 화를 낸다면 이런 사람에게 비판을 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 걸어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겸손하게 비판을 수용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씀과 또 비판을 거부하지 말라는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상충되는 말씀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비판에 대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꼭 필요한 두 가지 태도를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한 우물에서 쓴 물과 단 물을 동시에 낼 수 없다는 말씀처럼 우리 입에서 악한 말도 나오고 선한 말도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열 때마다 격려의 말, 칭찬의 말, 용서와 사랑의 말이 나오도록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마치 거룩한 고기처럼 소중하고 진주처럼 값진,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고치는 비판을 대할 때,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고 깨끗한 언어의 습관으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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