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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의 황금률 (마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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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한 큐에 끝내는 황금률 (마 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이 말씀은 흔히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유익하고 삶의 첫 번째 법칙으로 삼을 만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굳이 종교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 보편적인 가치로 수용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황금률이라고 하면서 따릅니다. 만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황금률을 실천하며 산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전쟁도 없을 것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황금률과 비슷한 교훈이 동서고금을 통해 많이 발견됩니다. 공자도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慾 勿施於人]고 했습니다. 탈무드에도 역시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가르침인 데 비해 이런 교훈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한 단계 낮은 은률(Silver Rule)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반열에 놓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반은총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를 위한 중요하고 유익한 가르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공자나 소크라테스처럼 도덕선생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도덕적 교훈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우선적인 목적과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황금률이라고 따르는 이 말씀을 단지 도덕적인 교훈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연히 우리의 도덕적인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결코 무시하고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어예요.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이 교훈을 주님께서 느닷없이 갑자기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무엇을 말하려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의 결론으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어떤 것이냐, 즉 그러므로가 걸리는 곳이 어디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때로는 그러므로가 바로 앞의 단어나 문구를 가리킬 때도 있고, 한참 지난 곳과 연결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지금까지 얘기한 전체 내용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맥을 잘 살피는 훈련이 성경연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도 그리 쉽지가 않은데, 일단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봅시다. 우선 바로 앞에 나온 내용과 관련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1절에서 뭐라고 하셨나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내가 대접받기 위해서 먼저 남을 대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그냥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점심 한 번 샀으니까 다음에는 저 친구가 점심 사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점심 대접받고 싶은 것은 나의 욕구인데 그렇다면 상대방도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욕구를 내가 충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보상으로 내 욕구가 충족되는 것을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내 욕구는 단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인식하도록 해 주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께서는 남을 대접하기만 하는 완전히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좋은 것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데, 우리가 이웃과 세상을 향해서 마음을 닫고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받을 줄만 알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관리 보호하고,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세우고, 또한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저는 종종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이기적이고 욕심도 많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이나 상태는 평균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게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더 높은 도덕성과 더 희생적인 삶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남들보다 조금 더 양보했다고 우리가 도덕적 만족을 느껴도 좋을 만큼 충분히 희생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거든요.

사실 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제하는 규범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생활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한 것이 될 정도의 매우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고 파괴시키는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정도가 돼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명함이나 내밀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인 삶으로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아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문장입니다. 내용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므로를 7장 처음 부분에 연결시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기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요구하기만 하는 것은 대단히 유아적인 미성숙한 태도지요. 자기는 더 잘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수만 찾아내는 것은 못 봐줄 노릇입니다.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채소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넘어 온 가지를 잘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옆집 주인은 나뭇가지를 자르면 볼품이 없기 때문에 자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재판장은 두 사람 말을 듣더니 그 다음날 판결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열린 재판에서 재판장은 나뭇가지를 자르라고 판결했습니다. 사람들이 재판장에게 왜 판결을 하루 늦췄냐고 물었습니다. 재판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뭇가지를 자르도록 판결하려고 했는데 우리 집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서 가지를 자르고 와서 오늘 판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무지무지한 비약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적이 있었지요?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을 한 마디로 하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등등 이런 것들에 철저하게 목을 매고 살던 바리새인들이 듣기에 기절초풍할 노릇 아닙니까? 그것이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한 결과란 말입니까?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언급하신 곳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40).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쉬운 말로 다시 설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접받고 싶어 하시는 대로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하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방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그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 이 세상은 이기적인 세상입니다.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요 원리입니다. 토마스 홉스가 말한 것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투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기적인 투쟁의 현장에서 참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섬기는 삶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야말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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