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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의 좁은 문 (마 0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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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약자로, 또는 소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스스로 소수가 된 경우가 아니라면, 타의에 의해서 혹은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소수로 살아가면서 고통과 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다수에 속하게 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여기서 다수라는 것은 꼭 숫자의 크기만을 의미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메인스트림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메인스트림에 소속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해서라도 돈을 좀 벌어 떵떵거리면서 한번 살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자신은 못 배웠어도 자식들이나마 제대로 가르쳐서 메인스트림에 속하게 만들려는 것이 부모들의 염원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순식간에 메인스트림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치가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있긴 있지요.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또 매주 복권을 사는 사람들도 순식간의 신분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메인스트림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애와 상대적 박탈감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외를 당하고 남들 하는 대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삶을 즐길 수 없게 합니다. 즐기기는커녕 죽지 못해 사는 것 아니겠어요?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왕따가 되겠네요. 다 자기를 싫어하고 멀리해서 외톨이가 된다는 것,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또 우리가 여기 뉴질랜드에서 소수민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까? 그런데 스스로 소수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소수로서 당해야 하는 불이익은 어쩔 수가 없지요.

이 사회에는 그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요구 또는 명령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요구를 수용하고 명령을 따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요구를 거절하고 거스른다면 그의 삶이 평탄하겠지요? 예를 들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이 종종 있습니다. 학교를 믿을 수 없거나, 혹은 자녀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또는 학교의 교육방침에 동의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이 사회가 일반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방법과 다르게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는 경우겠지요. 어쨌든 사회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 이 사회가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은 자녀를 둘 쯤 낳으라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셋 정도 낳고 얼굴에 철판을 깔거나 아니면 약간 불편을 감수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녀를 다섯 이상 낳는다는 것은 사회의 명령에 정면으로 거역하고 반항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녀를 다섯 이상 낳는다면 그것이 사회의 명령이 되겠지요. 그런데 자녀를 한 명만 낳고 버티는 사람은 좀 특이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반대로 역류한다거나 또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혼자서 가는 것은 힘들기도 하고 고독한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변인이라고 합니다. 가운데 있지 못하고 주변으로 몰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외곽으로 쫓겨났다는 말이지요. 일부러 외곽으로 나간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주변인이 불이익을 당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 속에 함께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는 것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남이 가지 않는 길로 혼자서 간다는 것은 대단히 큰 위험을 내포합니다. 혼자만 바보가 되거나 혼자만 낙오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큰 길로 가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보통 좁은 문이라고 할 때는 매우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취업의 좁은 문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경제사정이 악화되었거나 해서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졌다는 것이지요. 그 와중에서도 취업을 한 사람은 그러니까 매우 좁은 문을 통과한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결국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그래서 천국의 문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천국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한 것일까요? 천국의 문이 실제로 그렇게 좁은 걸까요? 그리고 큰 문과 넓은 길은 왜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진짜로 지옥문은 넓고 클까요?

여기서 좁고 험한 길, 또 좁은 문은 불편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소수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넓은 길과 큰 문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지요. 편하고 손쉬운 길입니다. 모두들 좋아하는 길이지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는 것, 메인스트림에 거스르고 역류하면서 힘들게 어렵게 사는 것이 생명을 얻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고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길입니까?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했는데 그것이 형제를 살인한 것이라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바보 같고 답답한 노릇입니까? 왜 그렇게 세상을 힘들게 사느냐고 하겠지요? 누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때리라고 대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아요.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분이 풀립니다. 그런데 더 때리라고 왼편 뺨까지 대주는 사람은 바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두 대를 때려야 분이 풀리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분을 참고 용서하면서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거칠고 험한 길입니까? 그 문이 들어가기에 얼마나 좁아요? 아무나 갈 수 있는 길,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잖아요?

금식을 하고 헌금을 많이 했으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잖아요? 착한 일을 했으면 마땅히 칭찬을 받으려 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속마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했다가는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거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은 우리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남들 가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서 못가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는 거예요.

우리도 남들 가는 것처럼 손쉬운 길로 가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다들 탈세하면서 기업합니다. 정직하게 장사하면 남는 것도 없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적당히 뇌물도 주고받으면서 웬만한 비리에는 눈을 감고 삽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길이에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일을 해도 남는 것은 더 적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 모양이냐? 왜 너만 그렇게 특출하게 나서서 남들 곤란하게 하고 피해를 입히는 거야? 좀 조용히 살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오히려 핍박을 받게 된단 말이지요.

지금까지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시려는 단계에서 주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들이 그저 권장사항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들은 우리가 듣고 잊어버려도 되는 말씀, 또는 그대로 따라 순종하면 더 좋은 그런 말씀이 아니라, 안 하면 안 되는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생명력이 없고 늘 무기력한 이유가 뭐예요? 그것은 바로 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죄지은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마치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숨으려고 했던 아담처럼 하나님 낯을 뵐 면목이 없잖아요? 넓은 길로 가면서 좁은 길에 계시는 주님을 흘끔 흘끔 쳐다보며 살자니 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있겠어요? 이건 주님 앞에 겸손한 것과 다른 차원이 문제예요.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의로운 줄 착각하고 뻔뻔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지요. 늘 부족하고 넘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겸손해야지요. 그러나 말씀대로 살려는 치열한 발버둥 속에서 겸손한 것과 말씀대로 제대로 살려는 자기부인의 삶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하게 사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아닌가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에요. 손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그 길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을 보장하는 길 아닌가요? 주님은 이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결론에 도달해서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자기부인의 가시밭길, 찾는 이가 없는 험하고 좁은 길, 우리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아서 늘 자신과 싸우면서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 자신이 그 길로 가셨고 그 길이 생명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세상에서도 강자의 법칙을 거부하고 다수의 가는 길을 마다하는 것은 고난과 외로움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하물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그 길이 협착하고 문이 좁아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약속하는 행복의 길은 때로 주님이 약속하시는 행복의 길과 정반대의 길인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모두가 즐거워하는 길이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결국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 십자가를 지고 어려운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 그리고 세상의 넓은 길, 편한 길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고 한눈팔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는 것, 쉬운 일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정말 좁은 길입니다. 선행을 많이 하고도 그것을 꼭꼭 감추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않고 먼저 내 눈 속의 들보를 빼내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길을 가는 동안 참된 기쁨과 하늘의 평안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마지막 그 좁은 문에 이르기까지 결코 실망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늘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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