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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녀의 아들 (마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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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일이 정해진 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긴장도 없고 양보도 필요 없고, 기적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가 다르거나 기대하는 것이 다를 때 긴장이 흐르게 됩니다. 주는 만큼 받고 책임이나 권리도 똑같이 나눌 수 있다면 특정인에게 희생이나 양보를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삶은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할 만큼 해결이 불가능한 일들을 많이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그야말로 긴장과 양보, 그리고 기적이 모두 필요했던 매우 급박한 현장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긴장은 마리아의 느닷없는 임신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의 상태인데, 말하자면 약혼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관습에서 이 약혼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약혼의 개념보다 훨씬 큰 구속력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같이 살면서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사실 부부이기는 하지만 법적인 부부는 아닙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는 그와 반대입니다. 아직 같이 살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의 부부는 아니지만 마치 혼인신고를 한 것처럼 법적으로는 부부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 상태에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면 그 여자는 온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만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마리아의 약혼자, 혹은 법적 남편 요셉은 어땠을까요? 정말 기가 막히지 않았겠어요? 한창 신혼의 단꿈을 기대하고 있던 예비신랑에게 이 일은 어쩌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나팔을 불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나팔을 부는가 하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온 백성이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입니다. 결혼을 앞둔 처녀가 남편 몰래 임신을 했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그만큼 심각한 일로 간주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과연 나팔을 불어야 할까요?

법과 관습에 의하면 요셉에게는 나팔을 불 권리가 있습니다. 배신감에 복수의 칼을 휘두른다 해도 누가 말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법률의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은 자기 밥그릇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 자기 권리도 찾아먹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권리를 찾아 누리는 것은 당연하고 남의 권리까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나팔을 불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 주장을 굽혔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배려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이나 권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것은 조용히 갈라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핑계나 이유를 대서 파혼을 하고 마리아에게 이혼증서를 주면 마리아는 그 혼인관계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설령 임신을 했다 해도 돌에 맞아 죽지는 않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럴 경우 임신을 시킨 남자를 찾아서 결혼을 시키든지 아니면 남자에게 벌을 내리든지 하면 됩니다.

성경은 그러한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바보같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이란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가 그 핵심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시는 가문으로 요셉을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만약 요셉이 나팔을 불고 임신한 마리아의 머리채를 끌고 동네를 돌았더라면 메시야를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들 역시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상대방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것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분노와 자존심보다 마리아의 목숨을 선택한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결정하는 선택으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다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암흑기를 살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끊어졌어요.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꿈에서조차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서 바로 천사를 만나지만, 구약의 맨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와 신약의 첫 페이지 사이는 무려 400년의 암흑 같은 세월이 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세월 동안 피눈물이 나도록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다시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이 우리에게는 별 감동이 없을지 모르지만, 마태가 기록한 이 책을 읽게 될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강한 의미가 담긴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서야 요셉은 자신의 삶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이는 우리도 암흑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깨닫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렇게 곤란한 상황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야 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족보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인간으로서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메시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없이 해야만 죄 없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리고 죄 값을 치르는 방법은 죽음입니다. 즉 인간은 죽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죽어버리면 어떻게 만납니까? 그런데 제사에서는 누가 죽습니까? 소가 죽어요. 어린 양이 죽습니다. 그래서 내 대신 죽은 소나 양의 죽음을 하나님이 임시로 받으시고 거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잖아요?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고 했어요.

죄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시는 메시야로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갈등이 생깁니다. 메시야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느냐는 거지요.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연법칙에 의하면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변신해서 인간 노릇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보통 인간의 생육방법에 의해 태어나시면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또 강구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바로 마리아를 통한 동정녀 탄생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하지요. 즉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왜 굳이 처녀를 택하셨는지, 그냥 이미 결혼한 여자는 안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생식방식에 의해 태어날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될 것이라면, 처녀와 결혼한 여자의 차이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마리아는 그 후에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를 더 낳고 살았거든요.

가톨릭에서는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보통 여자들처럼 남편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동생들이 있었거든요. 야고보 사도와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가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여동생도 있었습니다(마 13:55-56). 만약 가톨릭의 주장처럼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면 예수님의 어머니가 꼭 처녀였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실제적인 이유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자, 그럼 어차피 처녀의 몸을 통해 오실 거면 왜 하필 약혼한 처녀를 선택해서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메시야의 다른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메시야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요셉은 사실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도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16절에는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고 했어요. 다시 한 번 동정녀 탄생을 확인해주는 구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필요한 것은 그가 마리아의 법적인 남편이었고 천사의 지시를 따라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이 사건을 예언하면서 그를 임마누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를 우리 속에 영접하고 모셨을 때, 우리가 참으로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임마누엘의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서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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