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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피난 (마 0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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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피난 (마 2:13-23)

여러분 장기 둘 줄 아시죠? 장기를 둘 때 왕이 죽으면 그대로 게임이 끝납니다. 아무리 다른 말들이 많이 남아 있어도 왕이 없으면 게임을 할 수가 없지요. 장기에서는 사실 왕이 아무런 힘이 없어요. 포(包)나 차(車)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만, 왕은 궁궐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하기는 왕이 가장 중요합니다. 포나 차가 죽어도 게임은 끝나지 않습니다. 즉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없으면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5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약 900번의 외침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침략을 당했을 때는 왕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왕이 붙잡히거나 죽으면 나라의 운명도 그렇게 되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왕을 살려야 합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막을 힘이 없으면 왕이 서둘러 피난을 가야죠.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은 한양을 떠나서 의주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또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버티다가 결국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에 대비해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왕의 피난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합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왕으로 오신 분이 야밤에 황급히 피난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왕의 피난길은 초라하고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리는데, 많은 면에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됩니다. 아들의 반란군에 쫓겨서 피난을 가는 다윗의 모습은 어쩌면 아기 예수께서 급하게 피난을 가야 했던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해서 쫓겨간다면 덜 억울하고 덜 슬플지도 몰라요.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오는데, 그 아들을 피해서 피난을 가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영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어요(요 1:9). 동방의 박사들은 먼 곳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를 찾아왔는데, 그 왕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피난을 가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칼을 들고 저항하려 할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또 빌라도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그런데 왜 그 왕께서 피난을 가셔야 했습니까? 언제 왕이 피난을 가십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을 때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거부하는데 왕이 그들에게 왕노릇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 3:20)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끝내 그분을 영접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쓸쓸하게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우리의 욕망과 거짓된 모습, 죄악의 성품을 부인하면서, 그것들과 싸우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말로만 떠들면서 우리 삶 속에서 그것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시 주님을 피난길로 몰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하지 못하는 강퍅한 마음과 변화되지 못하는 삶이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피난길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떠난 후에 다시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즉시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일이 꼬이면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깨진다는데, 지금 요셉의 삶은 꼬일 대로 꼬이고 있습니다. 막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가 덜컥 임신을 한 것으로 드러나 간이 떨어질 뻔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호적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나사렛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멀고도 위험한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자리 한 구석을 찾아 아내가 순산을 해서 잠시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당장 일어나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라는 것입니다. 이거 사람 혼을 빼놔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지금 이 지경에 피난을 가라고 하십니까? 애를 막 낳았는데, 산모는 몸조리도 해야 하고, 아기도 안정이 필요한데 피난을 가라구요? 그것도 애굽이라니요? 애굽이 무슨 옆 동네인 줄 아십니까? 최소한 삼칠일은 지나야 산모가 바깥바람을 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요셉이 불평하고 짜증낼 만도 하지 않아요? 정말 왜 요셉의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 걸까요?

여러분의 인생이 꼬인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하나님 때문에 꼬일 때가 있단 말이지요. 올바로 살려고 할 때 더 꼬이는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려고 하니까 꼬이는 일들이 막 생겨요. 바로 그 꼬이는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순종이 테스트를 받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바로 그 꼬이는 순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던 마음,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작정했던 결심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불평만 하고 순종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들은 모두 그의 인생이 뒤틀리고 꼬이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사실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면 꼬이는 게 아니지요. 그러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는 그 문제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 어둡고 힘겨운 문제 뒤에 펼쳐지는 밝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해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려는 그 선한 결과로 가는 디딤돌일 수 있습니다. 만일 일이 꼬인다고 생각되면 한 걸음 물러서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그 복되고 아름다운 결과를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어쩌면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피난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물론 나사렛을 떠나면서 여행 준비를 단단히 했겠지만, 애굽으로 피난갈 준비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요셉이 급하게 피난길을 떠나는 데 있어서 박사들이 가져온 선물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큰 부피가 나가지 않으면서도 값이 나가는 그 선물들은 갑작스러운 피난을 위해서 아주 요긴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몇 개월이었는지 아니면 몇 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에 다시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납니다. 천사가 자꾸 요셉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요셉과 하나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힘들고 캄캄한 때는 언제인지 아세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과의 통로를 항상 확보하고 사세요. 그래야 우리가 범죄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명백한 대조를 볼 수 있지요? 아기를 죽이려던 자들이 죽었습니다. 반면에 죽임을 당할 뻔했던 아기는 애굽에 안전하게 숨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까지 죽이려고 했던 헤롯이 마침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헤롯의 전투에서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를 선언하고 계시잖아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내장이 썩는 중병에 걸려 아주 끔찍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난폭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어머니와 아들까지도 죽인 비정한 인간이지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런 헤롯의 잔인함을 빗대어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개가 되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메시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수많은 아기들을 학살한 인간이 벌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였으면 자기도 끔찍하게 죽어야지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자신도 언젠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자신도 그런 아픔을 당해도 싸지요.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은 나에게도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악한 말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곳이야말로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서로가 상처를 싸매어주고 서로 위로하면서 사랑하는 곳은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헤롯은 죽었지만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요셉은 꿈에 지시하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알려지게 됩니다. 메시야의 고장은 베들레헴이지 나사렛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 왕의 고향이지만, 나사렛은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곳이에요.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신이면서 동시에 나사렛 출신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왕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이 피난을 간다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요셉의 순종하는 믿음이 돋보이고, 또한 그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그분이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왕이심을 증거합니다. 저는 그분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하게 왕노릇하시고, 또한 우리가 왕이신 그분 앞에 겸손히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왕이신 그분이 다시 피난길에 오르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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