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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취임식 (마 0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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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젊은 남자와 여자가 조용히 같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식이라는 성대한 예식을 치름으로써 그들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세상 앞에 선언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조용히 같이 살아도 부부가 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려도 부부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선거를 해서 대통령이 선출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 일정한 날짜가 되면 대통령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임기가 시작되는 날 거창한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취임식을 함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무를 수행함에 앞서서 대대적인 예식을 갖습니다. 온 세상을 향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권한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는 일을 시작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임식을 해야 대통령이 되는 것처럼 인식될 정도입니다.

이처럼 의식(세레모니)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들이 기를 쓰고 생일파티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생일파티를 하건 안 하건 그날이 생일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일파티라는 의식이 없으면 그 날이 중요한 날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활기찬 삶을 살고 싶으면 그런 세레모니를 많이 갖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것이 너무 많이 남발되면 의미의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에서 그런 행사가 많으면 좋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그 아이를 축복하고 존재의의를 부각시킴으로써 아이의 자존감을 북돋아 줍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이 지나치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기억해서 서로 축하하고 그 날을 기념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공유하는 세레모니를 갖는다면 아주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날에는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중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중요성이 소실되어버립니다. 우리가 가게를 하나 열더라도 이웃을 초청해다가 개업식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새로 즉위하면서 대관식을 갖지 않고 조용히 왕노릇을 시작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로 왕이 되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마치 왕위를 찬탈했거나 또는 자격없는 사람이 왕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마태는 여기서 새로 오신 왕의 취임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왕으로 오셨는데, 그리고 이제 공식적으로 그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취임식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에 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신 적이 있다는 사건 하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미루어보아 예수님이 어떻게 성장하셨을 것인지 대략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의 증언들과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고, 예수께서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목수로 일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사생활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장황하게 기록되었다면 쓸데없는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마침내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선지자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취임식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취임식을 하셔야 할까요? 불행하게도 유대의 왕권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배층은 가장 부패하고 가장 개혁되어야 할 집단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공식적은 채널을 통해서 즉위식을 갖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공식적인 취임식으로 선택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요한이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가르치는 것은 자기들 몫인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니까 가만있겠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너희들 질문에 대답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나?”

이 질문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믿지도 않았으면서 하늘로서라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라고 했다가는 그를 선지자로 믿던 백성들에게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그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는 의미지요. 즉 예수님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인정하지 않으시는 반면, 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고, 그 뒤를 이어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 사실을 확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시자 요한이 펄쩍 뜁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그분의 신발을 수종드는 종노릇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또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요한은 단지 그 앞에 달려가면서 그분이 오신다고 소리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가 베드로 앞에 왔을 때, 베드로 역시 완강하게 반항했습니다. 절대로 내 발을 씻기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나 세례 요한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마디에 그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도 참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요한이나 베드로의 생각에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그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 한 마디면 우리의 생각을 뜯어고쳐야죠.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고 또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주님이 필요하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베드로나 요한이 끝까지 못하겠다고 버틴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어요?

우리가 종종 그런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 깐에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거역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은 이런 실수 많이 합니다. 보고 들어서 아는 게 많다 보니까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다 정해놨어요. 그래서 충성을 다짐하면서 그대로 밀고 나가요. 자신의 경험과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의 사역의 성격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분은 다스리고 군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낮아지심을 보이셨다면, 공생애의 마지막 행동으로 역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하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요한의 세례의 성격과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도 그것이 해당될까요?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의 연속성을 인정하시고 요한과 연합하심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지, 죄의 회개를 위해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죄인들이 하는 것처럼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낮아지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죄의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러 오신 왕의 취임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위대한 구속사역의 개시를 알리는 순간, 여기 성삼위 하나님이 모두 출동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오셔서 축하하고 기념하는 엄청난 세레모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는 순간, 하늘과 땅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을 우리가 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생일인지 결혼기념일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처럼, 구세주를 받아들이면서도 아무런 감동과 기쁨이 없다면 곤란하지요? 왕이 오시는데 환영행사도 없이 그저 밋밋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 속에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식어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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