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시험 받으시는 왕 (마 04:1-2)

첨부 1


우리가 종종 시험에 들었다는 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만, 특히 기독교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 시험이라는 단어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교회에 안 나오고 있다든지, 또는 무슨 사건으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거나 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용어의 사용이 꼭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시험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넓은 의미로 생각하면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모든 수작을 시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이 흔들리게 된 것을 시험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만도 없네요. 어쨌든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인 일 아닙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잖아요?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는다는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자 하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이 불가사의와 모순을 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요한은 펄쩍 뛰며 거절했습니다. 감히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라며 거듭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인간에게 세례를 받을 만큼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빌립보서 2장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낮아지심이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렇게 낮아지셨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대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은 그분의 성육신, 즉 인간을 입으신 그 속성상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오늘 구원받은 성도들이 삶을 규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분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셨는데,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거나 자기 잘난 맛에 산다면 정말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이 되겠지요.

또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시험을 받으신 때입니다. 여기 1절에 보면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언제입니까?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과연 하늘이 열리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이었을까요?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창공에서 물리적으로 어떤 변화나 현상이 발생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 계신 하늘이 우리가 있는 곳과의 연결 혹은 교통을 위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즉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그 자리에서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에 매우 중요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해서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시작하시는 순간에 성령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사건은 왕의 취임식이었습니다. 군악대의 팡파르와 기병들의 행진을 동행한 취임식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인정하시고 높여주시는 취임식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임하시고 참석하신 왕의 취임식입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거룩한 왕의 취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임하시며, 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경험이 채 식기도 전에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험에 빠지게 되기 가장 쉬운 때가 언제일 것 같습니까? 신앙생활도 게을리 하고 하나님 말씀을 멀리 하게 되면 시험에 들기가 쉽겠지요?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정말 놀라운 일은 오히려 우리가 큰 은혜를 체험하고 큰 승리를 이루었을 때가 바로 가장 시험에 빠지기 쉬운 때라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베드로를 말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로서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바로 금방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그 베드로 아닙니까? 그런데 불과 몇 초 만에 그는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하는 사탄의 시험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분들, 큰 은혜를 체험했다는 분들은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큰 은혜를 체험했을 때 시험에 빠지기 쉬운 때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과 근신으로 자신을 돌보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은 또한 반드시 치러야 할 관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시험을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은 아담의 행위에 근거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축복과 권위를 주셨는데, 그것이 유지될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표시는 금지된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사탄이 아담에게 다가와 그 금지된 열매,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고전 15:22).

그런데 그렇게 타락해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똑같이 아담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담이 시험에 실패해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을 이제 예수께서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 모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이 반드시 치러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시험입니다. 아담이 시험에 실패했다는 것은 인류의 타락을 의미하고, 예수께서 시험에서 이기셨다는 것은 인류의 회복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합니다(고전 15:22). 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고전 15:45).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셨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가기 싫은데 성령께서 억지로 끌고 가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이끌리어’라는 단어는 ‘인도함을 받아’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시는 그 과정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역하심을 알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늘 시험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데, 그렇게 시험 당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벧전 5:8). 만일 우리 힘과 능력만 가지고 그 우는 사자 같은 마귀를 대항해야 한다면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나 오늘도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특히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시험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이 없이는 승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험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시험을 당하신 주님, 그리고 그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에게 시험의 계절이 다가올 때 낙심하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