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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구멍이 포도청되지 않도록 (마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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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구인 동시에 가장 우선적이고 절실한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겼겠지요. 사흘 굶고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굶주림 앞에서는 도덕이나 아름다움 같은 다른 가치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습니까?

1984년에는 이디오피아에서 대기근이 발생해서 약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90년대 말 북한에서 극심한 기근이 발생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을 뿐 아니라 체제가 붕괴되지 않을까 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는 고착화된 가난에다 가뭄과 전쟁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기근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도 하루에 29,000명의 어린이가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 보니까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돕는다고 40시간 기아체험 등을 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우리는 굶주림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지요.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지요. 배가 고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처참함과 고통을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합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를 당해서 성 안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한 여인이 왕에게 나와서 다른 여인을 고소합니다. 저 여자가 와서 하는 말이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오늘은 네 아들을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제 내 아들을 먹었는데, 오늘 저 여자가 자기 아들을 감추고 내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굶어죽게 된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러한 굶주림의 문제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가신 주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오랜 날 동안 금식을 하셨을까요? 당연히 마귀의 시험을 받기 위한 준비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시험을 치게 되면 준비를 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시험을 대비해서 40일 동안이나 금식하면서 준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어떤 식으로 대비하고 삽니까? 물론 우리는 날짜를 정해놓고 시험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표를 정해놓고 시험을 대비하는 준비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시험을 당할 수 있고, 마귀는 쉬지 않고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시험을 늘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금식을 하는 이유는 딱 꼬집어서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근본적인 의미는 괴로움의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금식하는 경우들은 주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슬퍼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실하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흔히 금식이 동반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도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는다는 이 큰 사건을 앞두고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셨다는 뜻이 되겠군요.

금식 자체가 시험의 준비였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였지 않겠어요?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이 바로 시험 준비의 관건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지, 바로 그것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아이구,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도 없구요, 정신이 없어서 성경 볼 틈도 없어요.’ 기도할 시간이 없어도 좋아요. 성경 못 읽어도 괜찮아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일을 하면서도, 정신없이 바쁜 중에서도 지속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마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고 했어요. 무척 굶주림을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이 40일 금식기도에 도전을 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도 있고 심지어는 금식하다가 돌아가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40일 금식을 마치신 분들은 건강 상태가 의사의 특별감호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됩니다. 인간이 며칠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40일 금식하신 주님의 건강상태는 그냥 배고픈 정도가 아니었을 거란 말이지요. 특별히 성령께서 그의 육신을 돌보시고 지탱하도록 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첫 번째 한다는 소리를 보세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보아라.” 정말 비겁한 놈 아닙니까? 기본적인 결투의 에티켓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놈입니다. 40일 금식한 몸으로 결투장에 나온 상대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다니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시험의 특징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인정사정없이 찌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는 것보다 큰 유혹이 어디 있겠어요? 전에 우리 에스더가 40시간 기아체험 한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생각나는 것은 다 먹을 것이더래요. 눈만 뜨면 먹을 것만 생각나는 거예요. 평소에는 맛이 없다고 먹지 않던 것들도 그렇게 맛있을 것처럼 생각되더랍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은 우리보다 마귀가 더 잘 알 수 있어요.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다 있잖아요? 돈에 약한 사람도 있고, 여자에 약한 사람도 있고, 술에 약한 사람도 있더군요. 쉽게 교만에 빠진다거나 성질이 만만치 않아서 금방 폭발해버리는 성격이라거나 하는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약한 부분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약한 부분을 마귀가 건드려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 큰 맘 먹고 술을 끊으면 술 마실 기회가 자꾸 생긴다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열받는 일이 자꾸 생긴다거나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시험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우리를 실족케 하고 범죄하게 하는 일들 보세요. 우리가 저항하기 어려운 아주 약한 부분들이에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고 사는 사람에게 마귀가 돈으로 시험하겠어요?

과연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험하는 자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봤지? 40일 굶어보니까 죽을 것 같지? 그게 바로 인간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야. 저 불쌍한 인간들이 이 빵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프리카에서 기근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빵 한 조각보다 더 의미 있는 구원이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빵이 바로 복음인 거야. 장발장이라는 사내는 빵 한 조각 훔쳤다가 19년이나 감옥에 갇혀야 했지. 인간의 슬픔과 범죄도 모두 빵 때문이야. 굶어 죽게 되니까 엄마가 자기 아들을 삶아 먹는 게 인간이야. 사람들이 왜 저렇게 미워하고 박터지게 사는 줄 알아? 다 빵 때문이야. 먹고 살자고 도둑질도 하고 사기도 치는 거야. 정말 인간을 구원하겠다면 저들에게 빵을 줘. 빵이 바로 구원이야.”

사실 우리가 빵 때문에 갈등하고 죄도 짓는 수가 많지 않아요?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분쟁이 빵 때문이잖습니까? 그러나 빵이 충분하게 보장되면 분쟁이 멈추고 우리의 욕망도 끝이 날까요?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것 보세요. 이라크가 가지고 있는 석유를 뺏어서 더 부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에 일본처럼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왜 그렇겠어요? 지금보다 더 많이 갖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생존의 필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이어지는 메카니즘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배고픈 사람이 빵 하나 먹고 만족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많이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의 것이라도 빼앗아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빵을 많이 만들어 준다고 해서 끝날 일이 절대로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서 인간의 수명도 늘고 생활수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던 과거와 비교해서 풍부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이 더 정직하고 더 사랑하며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 빵의 시험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빵의 문제, 돈 문제가 어느 정도로 우리를 시험하던가요? 얼마나 자주 우리는 돈과 이익 때문에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께 범죄하기 쉬운 상황에 처하던가요?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아멘!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빵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먹을 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자유케 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빵이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실험에서 완전히 허구였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역시 빵이 선이요 구원이라는 모토를 다른 방법으로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돈의 노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주신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은 먹는 시험에서 실패했었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먹는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한 시험, 빵에 대한 시험, 돈에 대한 시험을 당할 때, 40일을 금식하시고 돌로 빵을 만들라고 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주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이 진리의 말씀으로 이러한 모든 시험에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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