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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갈치지 말란 말이야 (마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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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치지 말란 말이야 (마 4:5-7)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곳은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황량한 곳이고,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시험을 당하기 쉬운 곳처럼 생각됩니다. 당연히 광야는 무서운 곳이지요. 거친 땅과 거친 가시나무, 거친 들짐승이 출몰할 것 같은 곳이죠. 그런 광야에 함부로 갔다가는 온갖 어려움과 시험에 빠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마귀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Temptation Free Zone은 어디일까요?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요?

놀랍게도 주님이 두 번째로 시험을 받으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5절에서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거룩한 성이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굳이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 정말 뜻밖의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에나! 어떻게 거룩한 성에서 마귀의 시험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에서 마귀가 시험을 할 수 있느냐고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시험을 많이 받는 곳은 어디일 것 같습니까? 거칠고 황량한 인생의 광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시험을 받고 심지어는 믿음이 흔들리게 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위로를 얻고, 교회에서 믿음이 자라고, 교회에서 흔들리던 신앙이 바로잡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분들 보면 교회에서 낙심하고, 교회에서 싸우고, 미워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등지거나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해요. 광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서 그렇다는 거예요.

엊그제 들은 얘긴데, 어느 교회에서 남선교회 회원들이 리트릿을 갔어요. 그런데 뭐가 잘못돼서 두 사람이 좀 다투었나 봐요. 한 사람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렸는데, 한 사람은 그것이 너무나 괴롭고 상처가 돼서 날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울며 기도를 합니다. 또 자기가 당한 일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소연을 했어요. 별 거 아닌 줄 알고 잊어버리고 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까 자기가 완전히 몹쓸 인간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또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나겠어요? 결국 두 사람 모두 심하게 상처를 입고, 교회는 교회대로 편이 갈라지는 것처럼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갑니다. 이게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모임이라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남의 일처럼 생각됩니까? 듣기 어려운 신기한 얘기인가요? 사실은 늘 듣는 얘기지지요? 물론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할 것입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니까 그 성전을 파괴해버려야 합니까? 교회에서 상처받았으니까, 교회가 난장판이 되는 것을 보았으니까 교회를 떠나고 멀리해야 합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시험의 장소가 된 것은 성전이 나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곳이 마귀로서는 더 좋은 시험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서 시험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놓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Temptation Free Zone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시험을 받았다면 그것은 교회의 잘못이라기보다도 교회마저도 시험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탄의 전략과 속임수가 원망스럽고, 또 그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이 클 뿐입니다. 광야의 시험이든 성전에서의 시험이든 그 장소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마귀의 시험일 뿐, 장소를 탓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지요.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성전에서도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상처받고 교인들 때문에 시험들고 목사한테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고 믿음이 약해졌다고 하는 것은 변명거리가 되지 않지요. 장소와 상관없이 시험에 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의 책임이 크고 회개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실 교회로서의 존재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불러 모으시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도망을 치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가슴을 치며 통회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저는 정말로 우리 교회에서 시험에 드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때로는 오해도 생기고 의견이 달라서 대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의 시험거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그런 시험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시험에 지지 않고 이겨내야지요. 시험에 지는 것은 자신의 커다란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나무가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나만 아플 뿐이지요. 설령 목사가 엉터리여서 시험에 들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교회도 싫어지고 믿음도 잃어버리게 된다면 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입니까?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 교회 안에 시험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서로에게 오해나 상처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오히려 서로를 보살피고 서로 짐을 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때 마귀가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는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성전 꼭대기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높은 곳은 미끄러지기 쉬운 곳입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치고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는 사람 쉽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겸손하고 섬기기를 기뻐하던 사람도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되면 변해요.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자꾸 높여주니까 자연히 그렇게 성품이 굳어지게 되는 거예요. 특히 교회에서 높은 자리는 더 위험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젊어서 장로가 된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됐으니 얼마나 두렵고 또 겸손했겠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은 1년만 지나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맨 처음 운전면허를 땄을 때 조심스럽게 운전하던 사람이 1년 후에는 난폭운전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오랫동안 높임을 받다 보면 그것이 굳어져서 당연하게 되고, 즉 다시 말해서 교만이 성품으로 굳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높은 곳은 위험한 곳입니다. 메튜 헨리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낮은 곳으로 데려가시고, 마귀는 우리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했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이라고 했잖아요? 또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우리의 확신에 도전해서 그것을 혼란케 하고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광야에서의 첫 번째 시험에서도 그랬었지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라.” “너 정말 하나님의 아들 맞아?” “한번 증명해 볼래?”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교묘하게 거짓을 섞어가면서 확신에 대해 의심이 들도록 만들지요. “진짜로 그랬단 말이야?” “그게 정말이야?” 자꾸 이렇게 반복해서 물어보면 대답하는 사람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요. 그러므로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딤후 3:14)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구원파의 수법이 그렇잖아요? “당신 정말 구원받았어요?” “정말요? 언제 받았어요?” “증명해 보세요.” 자꾸 그러면 눈만 껌벅이게 되면서 할 말이 없어지지요? 그러나 흰 색은 백 번을 우겨도 검은 색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확신 가운데 거할 때 이러한 마귀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기 마귀의 시험에서 보이는 또 한 가지 거짓된 수법은 잘못된 논리의 사용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라. 천사들이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란 말이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봐.” 그럼 돌로 떡을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까?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게 됩니까? 어떠한 전제를 제시하고 그 조건과 상관없는 또는 반대되는 결과를 강요한 것이 사탄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밑에서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지 안 지키시는지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아주 악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마귀의 수법에 넘어가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문제는 마귀가 그런 거짓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 말씀에 그러지 않았느냐?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서 네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가지고 나오면 우리가 헷갈리지요. 성경말씀 앞에서는 할 말이 없으니까요. 마귀가 성경을 잘 알아요.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이단에 속한 사람들 성경을 줄줄이 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말문이 막히지요? 우리가 그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지 못하면 당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이지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거지요. “기록되었으되”라는 이 단어가 얼마나 힘 있는 말입니까? 내 생각이나 내 지식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말할 때 거기에 능력이 있고 확신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기본적으로 거짓말입니다. 거짓으로 우리를 헷갈리게 하고, 거짓으로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고, 거짓으로 우리가 싸우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할 때 이 거짓을 분별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험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거짓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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