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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흑암과 멸시의 땅으로 (마 0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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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과 멸시의 땅으로 (마 4:12-17)

왕이 행차를 하게 되면 그 앞에 먼저 가서 나팔을 불며 왕의 행차를 알리는 전령이 있습니다. 그 전령의 나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왕의 행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전령이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나서 드디어 왕의 행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령이 여전히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있다면 어떻겠어요? 곤란하지요? 전령의 역할은 왕이 도착하기 전까지입니다. 왕이 도착한 후에는 전령의 역할과 존재가 더 이상 드러나면 안 됩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그 전령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또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곧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요한이 말하던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세례를 주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선생님이 전에 말씀하시던 그 사람이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인기가 세례 요한을 앞지르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라이벌이 아니라 그분 앞에 나가서 외치는 전령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행차가 도착한 다음에는 섭섭하지만 더 이상 전령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태는 그 부분을 아주 유심히 관찰하고 그의 기록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 구절이 마태의 관점에서는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역할을 다했단 말이지요. 이제 왕이 활약하실 시간입니다. 더 이상 요한이 활약을 하면 안 돼요. 이제 요한은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그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히는 때에 맞추어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것은 이제 예수께서 나서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소식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수천 년을 기다려온 메시야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17절에서 말하기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요한의 시대가 가고 그리스도의 시대가 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슬픈 소식에 우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친척이기도 한 요한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이 이제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고향처럼 그립고 포근한 곳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출세를 하고 재물을 모았어도 결국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제가 엊그제 짐바브웨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수확철에는 900명을 고용할 정도의 커다란 커피 농장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농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커다란 댐까지 만들었다고 했다더군요. 무가베 정권이 들어선 후 극심하게 탄압을 당했는데, 어느 날 밤에 통지서가 왔더랍니다. 이제부터 이 농장은 정부의 소유이기 때문에 24시간 내에 떠나라는 거예요. 물론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뉴질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그래도 그 사람 하는 말은 자기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고향의 농장, 자기가 건설한 그 댐에다 뼛가루를 뿌려달라고 하겠답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특히 마음이 고단하고 몸이 지쳐 있을 때 고향은 더 그리워집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배어 있고, 부모님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던 고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배워 가족들을 부양했던 그 작은 동네, 아직도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나사렛이 바로 그곳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고향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역을 시작할 작정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왜 고향 나사렛을 떠나야 했는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누가는 그 이유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사람들은 목수가 갑자기 선생 노릇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끌고는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 성난 동네사람들의 손에서 빠져나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 고향에 머물지 않으시고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메시야의 고향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또 그 동네에 함께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그야말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 자기 동네에 있었던 것 아니에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 축복을 스스로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동네에서 쫓아내버렸어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것은 그들이 거부하고 배척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은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버지를 배척하고 떠난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랑의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범죄하고 배반하기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을 길이 참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비록 사랑하는 고향이지만 자기를 배척하는 나사렛에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시고 떠나셔야 했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려 할 때 우리가 순종하고 헌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곳이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제법 큰 도시입니다.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셨는데, 이것을 가리켜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9장 1,2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제비를 뽑아 각 지파 간에 땅을 나누었는데, 갈릴리 지역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아셀 지파, 잇사갈 지파에게 배당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땅은 자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솔로몬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회의 주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20년에 걸쳐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건축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람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솔로몬에게 공급했고, 그 모든 공사를 마친 후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20개를 대가로 주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물건 값으로 주어버릴 만큼 갈릴리 땅이 중앙으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네요.

그 후에 팔레스타인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갈릴리 지역에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반복되면서 혼혈인종, 혼합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하찮게 생각되던 땅인데, 그나마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 유대인들 보기에 이방인들과 혼혈 족속이 되어버린 갈릴리 사람들은 얼마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겠습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개하면서 그분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대뜸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갈릴리처럼 천하고 멸시받는 곳에서는 메시야 같은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믿음이었던 것이지요.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렇다면 그분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곳,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그 사역을 시작하셔야 마땅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멸시와 천대를 받고 소외를 당하고 있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마태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출세를 하고 뭔가 큰 일을 하려면 당연히 중심지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터인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분은 똑똑하고 거만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변방 사람들, 동족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갈릴리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되시러 오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똑똑하고 집안이 좋은 것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 있습니까? 의롭고 착한 사람이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와 사망의 흑암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은 그 어둠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흑암에 갇힌 채 버려진 우리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빛이 되신 그 주님을 만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에 빛이 비취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인생,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축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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