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쉬어가는 설교 (마 04:18-22)

첨부 1



쉬어가는 설교 (마 4:18-22)

오늘은 시간도 많지 않으니까 성경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보다 만화책의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가볍게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얘기를 나눠봅시다. 제가 지난 주에 해밀턴에 갔다가 어떤 강도사님과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체로 해밀턴 사시는 분들이 하는 얘기는 “타우랑가 좋지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곳에 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늘 살다 보니 잘 모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그 강도사님은 바닷가 출신인데, 어린 시절 집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통통배 소리가 들리곤 했답니다. 그래서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데, 바다도 없는 해밀턴에 살다 보니 타우랑가에 사는 제가 부러웠겠지요.

여러분에게 왜 타우랑가에 와서 사세요?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타우랑가가 좋아서 와서 사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예수님도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가서 사신 것을 보면 바다를 좋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갈릴리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만, 복음서에서는 주로 바다로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호수라는 단어도 사용되고 있지만 겨우 4번 나오는데, 마가가 한 번, 누가가 세 번 사용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누가는 갈릴리 호수를 한 번도 바다라고 부르지 않고 있군요. 그 외에는 늘 갈릴리 호수가 바다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바닷가 출신이 아닙니다. 나사렛의 목수였지요. 그러나 고향을 떠나서 가버나움이라는 바닷가 동네에 가셔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셨는데, 상황이 어땠을까요? 제가 약 3년 전에 교회를 시작하겠다고 타우랑가에 처음 왔을 때는 참 막막했어요.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거기다가 겨울이 시작되면서 맨날 비나 오고 하니까 우울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무작정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모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예수님도 그러셨을까요? 그래서 무작정 해변에 나가 돌아다니시다가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일까요? 이 본문의 기록만 본다면 그렇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이 지금 처음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고기를 잡고 일을 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니까 배와 그물,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다 버리고 무작정 따라나선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이 본문을 해석하면 아주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배경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그 부분만 해석하게 되면 아주 곤란합니다. 그러다가 이단도 나오고 삼단도 나오게 돼요. 예를 들어, 여기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단 말이지요. 사람을 낚는 어부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낚시하는 이미지 아니에요? 그러나 베드로나 안드레는 낚시꾼이 아니에요.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어부예요. 예수님이 지금 사람 낚시꾼을 만들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오른 낚시꾼의 이미지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적용하고 해석을 하면 안 된단 말이지요. 낚시로 고기를 잡듯이 영혼을 구하는 데는 일대일로 해야 한다거나, 낚시를 하면서 ‘우리가 고기를 낚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아야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인용하는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은 낚시의 낚자도 꺼내지 않으셨거든요. 그런데 왜 성경에 사람을 낚는다고 했나요? 그것은 우리 한국말로 번역하면서 추가된 단어입니다. 원문에 보면 할레이스 안쓰로폰, 영어로 직역하면 fishers of men, 그러니까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잡는 어부예요. 그런데 한국말로 사람을 잡는다고 하니까 좀 이상했는지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번역을 해가지고 원문에 없는 낚시하는 의미가 들어갔어요.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낚는다고 하지 않잖아요?

베드로와 안드레, 또 야고보와 요한이 처음 만난 낯선 남자의 말 한 마디에 생업과 가족을 떠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이 네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잘 아는 사이입니다. 안드레는 원래부터 메시야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형 시몬까지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 초면이 아니지요?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전세내서 타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그 사용료로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꿇어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베드로를 부르셨던 것이지, 바닷가에 돌아다니시다가 그냥 만난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안드레와 함께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가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요한은 자기가 쓴 글에서 웬만하면 자기 이름을 쓰지 않거든요.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사촌동생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고, 그래서 요한이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모시게 되었는데, 마리아는 요한의 이모였기 때문에 그것이 더 어렵지 않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사촌동생들이었는지를 증명해 볼까요? 그런 말은 아무리 찾아봐도 성경에 안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그 현장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세 명의 여자들이 더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과 동행하면서 수발도 들고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인지 찾아볼까요?

마 27:56,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막 15:40,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요 19:25,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결론은 어떻게 됩니까? 세베대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이고, 또 예수님의 이모가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쩌면 사촌들이 살고 있는 가버나움이라는 곳으로 일부러 이사를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을 무작정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전후좌우 잘 파악하지 않고 한 구절만 보고 놀라거나,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위대한 발견을 한 것처럼 흥분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