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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을 향한 여행 (마 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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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향한 여행 (마 5:1-12)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것이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들과 가르치신 내용들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마디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의 내용은 천국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4장 23절에서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전파하신 내용이 천국이었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5,6,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1절과 2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가르치신 교훈이라는 의미지요. 영어로는 Sermon on the Mount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등산을 가셨다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좋은 그런 언덕에 올라가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으니까 여러 차례 설교를 하셨을 것이지만, 마태가 잘 정리해서 기록한 것으로는 이것이 첫 번째 설교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마태가 기록한 첫 번째 설교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것도 매우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쓰신 책이 아니라 마태가 자신의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이 첫 번째 설교를 어떤 의도로 여기에 기록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의 메시지는 그의 왕국입니다. 마태는 그 왕국을 천국, Kingdom of Heaven이라는 단어로 표시합니다. 그 왕이 오셔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고, 이 첫 번째 설교에서는 그 왕국에서 어떤 법이 시행되고 적용되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령 알렉산더 대왕이 한 나라를 정복했다고 칩시다. 그럼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먼저 그 나라 백성들에게 새로운 왕국의 이념이나 왕의 통치철학, 또는 바뀐 제도 등을 말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마찬가지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을 선포하시면서 그 나라의 법을 우선적으로 설명하셔야 했단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이 산상수훈의 내용인 거예요. 그래서 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이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산상수훈이 상당히 기피대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따라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거든요. 아무리 믿음 좋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이 말씀 앞에서는 부끄럽게 되거든요. 또 그대로 살다가는 이 험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이나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까지 대 주라는 말씀은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조금 약점을 보이면 그것을 뚫고 들어와 아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이란 말이죠. 또 우리 성품에 맞지도 않습니다. 내가 한 대 맞으면 두 대, 세 대를 때려줘야 분이 풀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성품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산상수훈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힘들어요. 부담이 돼요. 왜 예수님이 이런 어려운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규범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산상수훈이 끝나는 7장 마지막에 보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특정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나중에 우리가 살게 될 그 천국에서 시행될 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천국에도 억지로 속옷을 빼앗고 오른편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거기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니거든요. 이 말씀이 지켜져야 할 상황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법으로 주신 말씀들이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위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 현실에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이 말씀을 성경책 안에만 있는 말씀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구체화되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도덕적 교훈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이 산상수훈은 율법의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어요. 율법 자체가 불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거나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율법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신 이 산상수훈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산상수훈의 중요성과 의미는 커요. 그러니까 이 산상수훈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말씀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두어야 할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이 부분은 팔복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Beatitude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복 받기를 원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로부터 받는 특별한 혜택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기복사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생각을 해보면 밥 먹는 숟가락에 복(福)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밥그릇 뚜껑에도 복자가 있었구요. 잠잘 때 베고 자는 베개에도 복자, 또는 목숨수(壽)자가 수놓아져 있습니다. 옷에도 그렇고, 게다가 복주머니, 복조리 등등 사방에 복, 복, 복이에요. 또 모든 이야기 속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그림을 상상해 보면 복 달라고 비는 것 아니에요? 그만큼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이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는 거지요.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서도 그러한 기복사상이 많은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보다 어떤 개인적인 축복이 더 강조되는 현상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복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복 중에서도 가장 우선이 되는 다섯 가지의 복이 있었는데, 오래 사는 것, 재물이 많은 것, 근심 걱정 없이 건강한 것, 도덕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것, 그리고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근대화와 서구화의 변화를 겪으면서 복의 개념은 개인의 행복추구로 많이 이동을 한 것 같아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복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행복의 열쇠는 돈이라는 명제가 강조되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은 일반적으로 돈과 권력과 쾌락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행복론이에요. 돈을 많이 벌거나 출세한 사람은 대체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고, 애통하는 자, 심지어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 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세상의 행복론에 의하면 얼마나 황당해요?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가 이 예수님의 황당한 행복론에 주목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과연 누가 복 받은 사람일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까? 얼굴이 예쁜 사람입니까? 그런데 복 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더군요. 남들 보기에는 정말 복 받은 것 같아도 정작 본인은 죽지 못해 사는 경우가 있지 않아요? 또 남들 눈에는 초라하고 복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제가 요즘 카운셀링 하느라 여러 사람들 만나보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눅 12:15)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감이 나더군요.

예수님의 행복론의 핵심 역시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나거든요. 시작은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지막은 어떻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그 천국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기 위해서였잖아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의 기준과 판단에 의하면 얼토당토 않는 예수님의 행복론, 애통해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복이 있다는 그 이상한 행복론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참된 행복, 그 행복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행복을 맛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 행복 속으로 한번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셨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행복,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우리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 가운데서 참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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