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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들만 들어가는 천국 (마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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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문구가 쉽게 눈에 띄고 편지함에 정치가들의 광고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선거가 가까워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생명입니다. 인기가 높아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요즘 돈 브래쉬의 인기가 헬렌 클락과 비슷하게 치고 올라오니까 노동당이 상당히 긴장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거에 나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버나움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은 간단했겠지요? 갈릴리의 주지사 선거에 나가도 쉽게 당선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예수님이 그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 나왔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보다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이 병적이라고 할 만큼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출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지금 예수님은 중요한 연설을 하고 계시는데, 그 첫마디는 인기를 끌기 위해 정치인들이 하는 얘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사실 팔복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가령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좀 생각을 해봐야 알 수 있지만, 그 말 자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그 자체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고, 또 그 말씀을 하신 배경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선 문자적으로 이 문구를 살펴보면, 헬라어 원어로는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영어로 직역하면 the poor in spirit이 됩니다. 우리말로 다시 직역하자면 심령에 있어서 또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쯤이 되겠지요.

일반적으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익함을 깨닫고 고백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구원을 받을 만한 의로움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항복하고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자기의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마음이지요. 만약 우리에게 자기의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헛것이 됩니다.

네, 물론 우리는 가능하면 의로워야지요.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야 하고, 교통신호도 잘 지켜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기도 해요. 그런데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보상을 해주셔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 그것은 자기의가 되고 맙니다. 자신이 의로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보다 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게 되면 자기의를 쌓는 일이 됩니다.

이 자기의의 관점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예가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 것은 예수님의 비유에서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훌륭한 사람이지요? 탈세도 하지 않았고,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습니다. 또 종교적 의무도 매우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이런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리는지 모릅니다. 특히 소위 “대예배”에서 장로님들의 목에 힘들어간 기도는 이런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협박에 지나지 않아요. 내가 이만큼 의로우니까 인정하고 보상해 달라는 거지요. 내가 충분히 의로우니까 의롭지 않은 인간들 좀 멸시하겠다는 거예요.

반면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보세요. 같이 기도하러 올라간 세리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못된 인간이지요. 자기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노입니다. 자기 나라를 침략한 로마 정부에 빌붙어서 자기 민족을 착취하고 괴롭혀서 자기 배를 채우는 인간입니다. 얼마나 악한 자들입니까?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몹쓸 인간인지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하셨어요.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고, 금식과 십일조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과, 자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세리 중에서 누가 더 의로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바리새인이 더 의롭게 살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세리가 의롭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세리가 백성을 착취하는 것이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불의를 행치 않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의롭지 않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가난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심령과 의롭지 못한 행실의 불일치가 언제나 허용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종종 비난을 당하는 부분이 뭔가 하면 잘못을 해놓고도 너무나 쉽게 빠져나갈 구멍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회개를 해버리면 되니까요. 그래놓고는 똑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고 또 회개하고... 그러나 이런 회개는 아무리 가슴을 치고 눈물, 콧물을 쏟는다 해도 가난한 심령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 세리가 그렇게 기도를 한 다음 날 백성들을 착취하고 못된 짓을 계속한다면 기도할 때의 그 가난한 심령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심령이 가난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기 때문입니다. 죄의 시작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지위를 욕심내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는 사탄의 범죄가 그랬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에 넘어간 인간의 범죄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기 참으로 심령이 가난하신 분이 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실감이 나지 않으니까 실감나는 얘기를 해볼까요? 제가 엊그제 Maid in Manhattan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호텔의 청소부가 어쩌다가 그 호텔에 묵게 된 국회의원과 데이트를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호텔 청소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중인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은 사실 이 청소부가 호텔 방을 청소하다가 장난삼아 그 방에 묵고 있는 손님의 고급 옷을 입어보고 있는 순간에 어떻게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원의원 후보는 자신과 비슷한 상류층의 여자인 줄 알고 데이트를 했는데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여자는 엉겁결에 시작된 일이 묘하게 발전되는 통에 어쩌지도 못하고 곡예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며 사건이 진행됩니다.

언론에서는 상원의원 후보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고 떠드는데, 일이 꼬이고 꼬이다가 결국 이 여자가 호텔 청소부라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속였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만약 내가 호텔 청소부라는 것을 당신이 알았더라면 눈길이나 줬겠느냐면서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호텔에서 해고를 당한 이 여자는 다른 호텔에 취직을 하는데, 선거운동을 위해 그 호텔에 와서 기자회견을 하던 상원의원 후보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그러니까 여자가 자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이 호텔 청소부 마리사예요.” 그러자 남자도 자기를 소개하지요. “나는 상원의원 후보 크리스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은 만남이 되었습니다. 언론에는 이 두 사람의 로맨스가 대서특필되고 남자는 결국 상원의원에도 당선이 됩니다.

재미있는 한 편의 영화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을 하게 영화였어요. 상원의원 후보가 호텔 청소부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호텔 청소부를 사랑하기 위해서 상원의원 후보를 사퇴하고 자기도 호텔 청소부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호텔 청소부를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상원의원 후보라면, 정말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지요.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낮은 곳에 있는 사람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보스는 부하들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가져오신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심령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상당히 가난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이 무뎌지고 목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뭔지 생각 안 하고 살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내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실 만큼 가난한 심령을 가지신 주님이 천국의 왕이실진대,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다면 결코 그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가난한 심령이 목격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가운데 가난한 심령이 묻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가난한 심령을 실천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가난한 심령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심령으로 오늘 천국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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