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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로 가는 천국 (마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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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말로 할 수 없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복 받고 싶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하겠지요? 보통 우리가 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것을 우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뭔가 하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왔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혀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가 버리지 않을까요?

애통이란 슬피 우는 것입니다. 우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기가 배고파서 우는 울음도 있고, 꼬마가 벌 받으면서 훌쩍이는 울음도 있고, 조용히 숨죽여 훌쩍이는 울음도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영어로 mourn인데, 이 단어와 관련되어서 가장 쉽게 연상되는 장면은 장례식에서 슬피 우는 모습입니다. 깊은 마음 속의 고통과 슬픔으로 인해서 나오는 울음입니다. 우리 말로는 애통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 말은 슬픔이 너무 심해서 아주 아프게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깊은 고통 속에서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우는 것이 복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애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고, 현재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기가 막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통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에 당한 깊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며 애통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런 불행한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걸까요?

물론 예수님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스러운 삶이 복되다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러한 불행과 고통은 인간의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이 될 수가 없지요. 여기서 주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천국을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범죄의 결과로 당하는 슬픔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고통스러운 삶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이 될 수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이 계기가 되어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할 수 있지만, 힘들게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이 주어질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떻게 애통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이 애통하는 사람은 앞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상관없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애통하는 사람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던 세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했던가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뭘 잘못 먹고 속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바로 애통의 표시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애통하는가 하면 자신의 의롭지 못함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겠습니까?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만 있는 여자를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그러나 자기가 행한 일이 얼마나 악한 것이었는지를 깊이 뉘우치고 그것을 괴로워하면서 슬피 우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받으실만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회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넘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꼽으라면 구약에서 다윗과 신약에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도 믿었던 다윗이 죄를 짓습니다. 죄도 보통 죄가 아니었어요. 자기 군사들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궁궐에서 낮잠이나 자다가 옥상에 올라가 멀리서 예쁜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인가 알아봤더니 지금 전쟁터에 나가 있는 부하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자를 데려와서 섹스를 했어요. 그런데 그만 이 여자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 있는 그 남편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집에 오게 했습니다. 자기가 그 여자 임신시킨 것을 숨기려는 수작이지요? 그 남편이 집에 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면 남편은 그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 알고 키울 것입니다. 정말 스토리가 꼬이겠지요.

그런데 이 충성스러운 신하는 동료들이 지금 목숨 걸고 싸우는데 자기만 편안히 집에 가서 아내를 안을 수 없다며 집에 안 가버렸어요. 그러니 다윗의 복창이 터질 일 아닙니까? 결국 다윗은 군대의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이 부하의 손에 들려 보내는데, 내용은 이 사람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몇 가지 죄를 지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까? 죄라는 것이 그래요. 죄는 다른 죄를 낳고,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이 다윗의 죄를 보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노여워하셨을까요?

그래도 다윗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여자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특급 강력범죄를 골고루 짓기는 했지만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회개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얼마나 울었으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운다고 했을까요? 눈물이 방에 가득차서 침대가 둥둥 떠다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 시에서 다윗이 얼마나 자신의 범죄를 슬퍼하며 괴로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눈물로, 이 애통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 노래하기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했습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사람이 간통에, 사기에, 살인교사 등등 온갖 죄질이 무거운 강력범죄만 한꺼번에 짓고 나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오죽했으면 밤마다 눈물로 침대를 띄운다고 했겠어요? 그런데 그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요구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눈물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릴 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끝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위로를 받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복 받은 사람 아닙니까?

바울 역시 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람이 무슨 애통할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지요?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부르짖었어요. 바울이 그렇게 애통했던 이유는 자기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한 다른 법이 그 마음의 법과 싸워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자신을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며 애통했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애통해야 할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애통할 일이 없다면 우리는 다윗이나 바울보다 훨씬 뛰어난 의인이거나 혹은 거짓말쟁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애통하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습이 아무런 의도 없고 오히려 악한 것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하면서 슬퍼하는 것, 내 속에 있는 사악함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것,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고 애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슬퍼하며 애통할 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용서하시고 위로하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강가에서 우리가 거기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이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울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것이 서러워서도 울었겠고, 고향이 그리워서도 울었겠지만, 그 눈물의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께 범죄해서 징계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참회였습니다. 이 눈물의 순간, 눈물의 장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순간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애통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상처를 받고 슬픈 일을 당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애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불의가 횡행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애통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슬퍼하고, 사탄의 권세 아래 억눌린 하나님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는 불의와 죄악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 주님 다시 오셔서 모든 눈물을 우리 눈에서 씻기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이 참으로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되시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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