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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을 기업으로 받아야 천국에 간다 (마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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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기업으로 받아야 천국에 간다 (마 5:5)

우리 에스더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한번은 공동묘지를 지나가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땅이 하늘로 연결되어 있어요? 죽은 사람을 땅에 묻었는데 어떻게 하늘나라로 가요?” 저는 아직까지 그 질문에 대답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땅과 하늘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 에스더의 질문에서 그 대립구도가 무너져버립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왜 갑자기 땅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복 있는 사람 가운데서 어쩌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지 모릅니다. 글쎄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이해가 될 것 같은데, 도대체 온유하다는 것과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온유한 사람은 땅을 소유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천국을 가진 사람과 땅을 가진 사람이 나뉘는 걸까요?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정복의 역사였습니다. 정복이라는 것은 땅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빼앗고 승자가 되는 것은 힘이 있는 자입니다.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는 힘으로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하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프리카에서 보니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최소한 동물의 세계에서는 맞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분은 사우스 아프리카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아프리카의 넓은 초원을 점령하고 있는 동물은 사자나 표범 같은 난폭하고 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기린이나 얼룩말 같은 온순하고 연약한 것들이라는 거지요. 저도 아프리카에 몇 년 있으면서 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초원에는 늘 가젤이나 얼룩말 같은 동물들밖에 없거든요. 물론 사자가 한번 나타나면 초원의 질서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 땅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공포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어느 순간 초원은 다시 온순한 동물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어쩌면 인간의 세계보다 덜 타락한 동물의 세계에 하나님의 질서가 더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상수훈을 팔복이라고 해서 여덟 가지 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개별적인 여덟 가지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만 받고, 심령이 가난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지는 못할망정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겠어요? 애통하는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으니까 그것은 포기하고, 그 대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나 받아야겠다는 것도 말이 됩니까?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누가 천국에 합당한가 하는 것이지요.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여덟 가지 측면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는 자신의 영적 파산, 무가치함을 깨닫고 전능자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즉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가난한 심령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할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야말로 추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애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지고 자기 자신을 보면서 슬피 울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거칠고 가혹하게 대할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이 조금 잘못했다고 쉽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좀 약하다고 그 위에 군림하고 윽박지를 수 있나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폭력이란 약자에 대한 강자의 불만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표시로 폭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물리적인 폭력, 언어의 폭력, 감정적인 폭력, 이 모든 폭력은 자신이 남보다 낫고 강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지고 자신의 추하고 악한 모습에 심하게 슬퍼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거칠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히 온유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심령이 가난해진 결과이며, 애통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는 역시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와 동일인인 것입니다.

주님은 온유해야 천국에 합당하다고 하시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온유한가요? 우리의 언어생활은 얼마나 온유함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평소의 우리 얼굴에는 온유함이 몇 퍼센트나 반영되고 있나요? 때로는 우리가 온유하고 싶어도 세상이 우리를 온유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도 합니다. 온유해 가지고는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나가 싸우고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고,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칠어야 되고 자기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존경도 받을 수 있고, 또 평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성질이 고약하니까 조심해야 돼. 비위를 거슬리게 해서는 안 돼. 반면에 이 사람은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니까 좀 함부로 해도 괜찮아. 좀 섭섭해도 참고 그냥 넘어갈 거야. 우리가 보통 그렇게 되지 않던가요? 온유한 사람은 손해 보고 무시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세상 살아가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덕목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주님 말씀은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십니다.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유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온유함은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굽실거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온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힘이 컨트롤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힘이 있다고 있는 대로 쓰는 것은 폭력에 지나치지 않습니다. 온유는 분노가 다스려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분노가 있는 그대로 폭발하는 사람은 온유함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힘으로 땅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땅의 개념과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1차적 청자(聽者)인 군중들은 예수님이 땅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적용해야 할 원리는 그 말씀의 당사자들에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땅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유대인 독자들은 땅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유대적 관점에서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매개체입니다.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이 땅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땅이 빠지지 않아요. 땅이 없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이 징계를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죄악으로 물든 이 땅은 회복이 되고, 기한이 찬 후에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근거해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태도는 매우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땅은 힘 있는 자가 싸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받는 것입니다. 땅과 관련된 토지제도 역시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 즉 언약에 충실한 것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실 때, 거기 있던 군중들이나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를 읽던 독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겠어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선조들에게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언약이 나에게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이 마치 이삭에게서 성취된 것처럼, 요셉에게서 그 언약이 성취된 것처럼, 모세를 통해서 그 언약이 성취되고,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성취된 것처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나에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천국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온유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자신과 올바른 관계,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유하십니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처럼 우리가 온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이 온유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운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온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러분의 실제 생활 속에서 이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얼마나 온유하세요? 여러분의 온유함에 가정의 행복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서는 온유함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고 있나요? 교회 안에서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현장을 가꾸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서 온유하게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날카로운 비수가 꺾이고, 눈빛 속에서 불타는 분노가 사그라지고, 표정 속에 드러나는 격한 감정이 조절되어서, 어느 때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유한 모습 속에서 천국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이 증거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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