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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굶주림으로 맛보는 천국 (마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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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꾸 울면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만들려고 떡을 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속담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의 간절히 원하는 모습이 엄마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배가 고프면서도 괜찮다고 하면 얄미워서라도 안 주게 되지 않을까요? 사모한다는 것, 뭔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큰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았던 것을 얻는 수도 있고, 꿈도 꾸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생기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보다는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애를 쓸 때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고, 또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소원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아요. 죽는 날까지 조국이 독립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애국지사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이루어드리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것 아닌가요?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 기쁨도 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사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원이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지금 무슨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선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꿈이 정당하고 정직한 것일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갈망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하나님께서도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러한 본성을 통해서 구하는 우리와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관계의 본질적인 성격이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으로 이러한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우리가 대체로 간절히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그 어떤 것입니다. 갖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요. 자식을 낳지 못한 사람이 자식 갖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돈이 없어 가난한 사람이 돈을 벌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죄가 아니지요.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사랑 받기를 간절히 사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세주로 오셔서 천국을 가져오셨는데, 그 천국에 합당한 사람의 네 번째 특징은 뭔가 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여기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주린 상태, 목마른 상태가 아니라 갈급해하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하면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즉 며칠 굶은 사람이 음식을 간절히 사모하듯이, 또한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목이 타는 사람이 물 한 방울을 그리워하듯이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의가 없으므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없이 슬퍼하며 울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 다음의 행동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자신에게 의가 없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바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모함의 정도가 어떤가 하면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배고픈 사람이 ‘아, 점심을 굶었더니 배가 출출하네, 빨리 집에 가서 삼겹살이나 구어 먹어야겠다.’ 또는 ‘날씨가 더운데 시원한 콜라나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빵 한 덩이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의 절박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가던 사람들의 눈빛을 우리는 TV 화면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빵 한 덩이가 목숨보다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그 빵이 없으면 목숨도 부지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풍요한 땅과 풍요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만, 굶주림의 고통은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빼앗아버릴 만큼 처참합니다. 또 목마름의 고통은 어떻습니까? 심한 갈증을 말할 때 우리는 목이 탄다고 표현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바로 그런 절박한 갈망의 언어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제 좀 와 닿습니까?

인간은 대체로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또 재물을 향한 갈망의 수위도 매우 높습니다. 심지어는 돈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쾌락이나 자기성취에 대한 욕망도 작지 않지요. 그래서 공부에 미쳤다, 노름에 빠졌다, 여자에 빠졌다, 이런 말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지요.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어렵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의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면 정말 다른 곳이 되겠지요. 어쩌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겠지요. 어쨌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성품에 맞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던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보다 선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먹고 입는 것을 해결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의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의를 착하게 사는 것, 또는 사회적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우리 사회에서는 의의 개념을 도덕과 윤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말씀일까요?

의의 개념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고 하셨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동일한 것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란 옳고 도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의 개념이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의라는 것은 빗나가지 않고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 의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모범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시던 모습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나의 뜻을 포기하는 것, 나의 주장과 나의 속성이 죽고 하나님의 원대로 나의 삶이 진행되는 것, 이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우리를 맞추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채 옳고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될 때 우리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결국 의로움의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거짓말하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옳고 정직하지 못하게 산다면 역시 거짓말일 테니까요.

내가 아무런 의도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고 그 의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천국을 약속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와 축복의 말씀입니까? 배가 부를 만큼 우리에게 의를 채워주시겠다는 것 아니에요? 의를 조금 맛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풍족하고 넘치도록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노력하고 발전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갈망하는 죄인에게 의를 부어주셔서 의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죄인에게 의가 주어지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자신의 몸을 우리가 먹어야 할 빵으로, 그리고 죄값으로 흘리신 자신의 피를 우리가 마셔야 할 음료수로 상징화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깨달은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데,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배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면서 도래한 나라, 즉 예수님이 가져오신 나라가 천국이고, 그 천국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의를 사모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물론 당장 끼니를 걱정하거나 눈앞에 근심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급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가져야 할 소원은 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고 추구할 때 그 의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증거되는, 그래서 천국을 소유한 기쁨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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