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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로 여는 천국의 문 (마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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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혹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여덟 가지 특징 중에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네 가지 특징들은 인간의 내부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들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발견한 것이었고,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의가 자신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결과로 애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슬퍼하고 가난하게 된 사람의 마음이 온유라는 형태로 다듬어지게 되고, 이러한 사람은 결핍한 의를 채우기 위해서 늘 굶주리고 목말라할 만큼 의를 사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적인 성품들이 처음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의 형태가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 말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수백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굳이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남을 가엾게 여겨서 돕는다는 뜻입니다. 여기 나오는 긍휼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엘레에몬’인데, 자비로운(merciful)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이 긍휼로 번역된 경우도 있고, 자비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으로 번역된 곳도 많이 있어요.

긍휼히 여기는 것, 즉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라면, 그것이 왜 그러한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 더 나아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이러하니 너희도 이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는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선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미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비극이 된 타락과 반역은 스스로 하나님 닮기를 포기한 것이었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으로서 원래의 모습과 관계를 회복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면 헛공부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는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람,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매우 닮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서로의 처지와 위치에 커다란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시험 봐서 빵점을 맞은 아이가 빵점 맞은 다른 아이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면 좀 우습지 않겠습니까? 승진에서 탈락한 사람이 승진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할 때, 또는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했을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가능하게 됩니다. 길을 가는데 차가운 밤거리에서 젊은 엄마가 잠든 아이를 옆에 뉘여 놓고 연탄불에 고구마를 구워 팔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아내가 따뜻한 방에서 아이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부르고 있을 것인데, 왜 저 엄마는 차가운 거리에 나와서 고구마를 구워 팔아야 할까?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까? 아니면 사업이 망해서 거리에 내몰리게 되었을까? 저 아이는 또 얼마나 불쌍한가? 저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제대로 치료를 못하다가 폐렴으로 악화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그러면서 그 사람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만약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내 아내라면, 그리고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것이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슴속에서 얼마나 뜨거운 고통과 슬픔이 솟구치게 되겠어요? 그래서 이미 나의 고통과 슬픔이 된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돕기 위해 그 다음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긍휼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합당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비참한 형편에 처한 상대방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과 우리 죄인들을 동일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신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죄악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간과 동일한 존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체휼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4:15-16).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엄청난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속도위반으로 경찰에게 걸렸다고 합시다. 그 순간에 여러분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경찰의 자비가 아닌가요? 경찰 마음먹기에 달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자비를 얻어내기 위해 변명도 하고 사정도 합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다음부터 조심하라면서 봐 주었습니다. 자비를 베푼 것이지요.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자비라는 것은 받는 사람에게 그만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아버지를 닮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자신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제하는 것에 매우 높은 순위를 둡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제정하신 이유는 기업이 없는 레위 족속과 또한 고아와 과부들을 부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외국인과 나그네들을 배려하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곡식을 거둘 때 밭의 모퉁이에 있는 것은 그대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그것이라도 갖다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삭을 주우러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밭에는 주울 게 많은데 다른 밭에는 주울 게 별로 없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은 무슨 차이입니까? 뭐, 일하는 사람이 꼼꼼했거나 또는 허술했다는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보아스가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 이삭을 많이 떨어뜨리라고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밭에 와서 이삭을 줍고 있는 모압 출신의 과부 룻을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하는 것을 하늘에 저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눅 12:33). 젊고 유능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오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어요.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삭개오에게 천국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초대교회에서는 구제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사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이 참으로 복되고 소중한 이유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긍휼히 여기는 것이 천국에 합당한 조건이 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지요. 경찰관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속도위반 스티커를 면제받는 행복입니다.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로부터 얻는 자비는 더 큰 행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바로 천국을 받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행위임과 동시에 그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는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이 참된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영원한 멸망과 심판을 향해 가는 사람들, 세상에 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에게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자비가 무엇일까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것 아닙니까?

이 시대는 긍휼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인심이 각박해진 세상 아닙니까? 옛날에는 까치밥이라는 게 있었어요. 가을이 깊어갈 무렵 감나무에 감 하나가 빨갛게 달려 있는 것이 까치밥입니다. 겨울이 되면 까치가 먹을 게 많지 않아요. 그래서 감을 따면서 까치가 먹을 것을 하나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감 하나가 까치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 먹을 것이 많지 않게 된 까치까지 긍휼히 여기는 상징적인 풍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까치밥을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갈수록 세상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럴수록 긍휼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요청되지 않습니까? 나밖에 모르고 내 자식밖에 모르는 사람, 남이야 굶어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 천국을 소유할 수가 없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우리가 체험하고 깨달을 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우러나오게 될 것이고, 또 그것은 우리가 지금 천국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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