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평화를 만들어서 천국의 주인이 된다 (마 05:9)

첨부 1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위치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위해 공헌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마음 맞는 우리끼리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면서 잘 사는 것이 우리의 존재 양식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하게 될 때 우리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집단으로 비쳐지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세상 사이에 대치국면이 형성되겠지요. 말하자면 교회가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즉 천국에 합당한 사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 peace-maker여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평화의 부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모두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 간에 평화가 없으면 전쟁이 납니다. 가장 최근의 전쟁이라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사건이 되겠군요. 미국이야 별로 큰 고통을 겪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라크 사람들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평화의 부재는 이처럼 큰 희생을 초래합니다.

부부간에 평화가 없으면 사는 것이 지옥입니다. 평화가 부재한 상태는 평화만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 미움과 분노가 자리를 잡습니다. 평화의 부재는 인간의 삶을 황폐하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친구 사이에 평화가 깨지거나 집단 간에 평화가 사라지게 되면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해집니까? 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살게 돼요. 그래서 평화가 없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저는 전에 우리 에스더 피아노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평화가 깨진 적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그 선생님에게 불만이 많았고, 제 아내도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한테 가겠다고 했더니, 그만두려면 반 텀 전에 통보를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안 했으니까 반 텀 레슨비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 내겠다고 했지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했고, 그 선생님은 분명히 했다고 하니까 둘 사이에 평화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고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지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나에게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도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유지하라는 말이에요. 예수님께서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다는 것이 생각나면 예물 드리는 것 중지하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한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어요.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예물 드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평화 없이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예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평화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모두가 평화를 사랑합니다.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물론 평화가 없어야 이익이 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싸움이 있어야 실력이 발휘돼서 출세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야 무기를 팔아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심지어는 전쟁을 하는 사람들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peace-lover입니다.

그런데 peace-lover가 된다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못 되지요. 물론 peace-breaker보다야 낫지만, 주어진 평화를 누리기만 하려고 해서는 정말 그 평화를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나아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peace-keeper가 되어야 평화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부부 사이에서도 우리가 많이 경험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평화를 누리기만 하려고 했다가는 쉽게 잃어버릴 때가 많지요. 그저 생각 없이 내뱉는 말 한 마디에 평화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긴장이 고조될 때가 얼마나 많던가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때로는 희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내 권리를 다 찾아먹으려고 하거나 내 주장을 내세워서는 평화가 유지될 수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평화를 지킬 줄 아는 사람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저도 억울하지만 그 피아노 선생님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보하고 손해를 봐야 했어요.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줘버리고 나면 오히려 내 마음 속에 평화를 찾을 수 있고, 또 그 선생님과의 사이에서도 평화를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필요한 것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을 우리는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이 peace-maker야말로 칭찬을 받을 사람이지요.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몹시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실 전쟁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단 말이지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커다란 전쟁을 치룰 강력한 군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지요.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왕국은 바벨론에게 망해서 온 백성이 전쟁포로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잠시 독립을 해서 살 길을 찾는가 했더니 결국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에 휩쓸렸다가 마침내는 로마제국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우리도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또 러일전쟁,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다가 일제의 지배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민족에게 깊은 한이 생기게 되었단 말이지요. 특히 일본에 대한 적대감, 이거 쉽게 없어지지 않아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국민감정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한에 비해서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원수 갚을 날만 고대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가 오시는 날, 그 복수가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라고 생각되는 예수라는 분의 입에서 일어나 궐기하라는 선동의 구호가 나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복수가 아니라 평화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팔복이란 여덟 가지의 복이 아니라 천국을 선물로 받게 된 복된 사람들의 여덟 가지 특징입니다. 그것은 심령이 가난해서 애통하게 되고 온유하면서 의를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이 사람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은 평화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 상황에서 이 사람의 행동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칼을 뽑아들고 복수를 감행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겠지만, 그것은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긍휼히 여기는 특징과 일치하지 않잖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없는 평화를 만들어 증오와 분노가 넘쳐나는 그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처럼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천국의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만 해도 감지덕지할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겠다고 하니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여기서 우리는 화평케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이루셨잖아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죄인이 되는 바람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불행이었습니다. 죄의 삯으로 멸망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뚝딱 평화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요. 그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당하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 평화가 없어 죽어가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라는 뜻에서 평화의 복음이 아니라,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수를 꿈꾸던 그 원수들은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 사이에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고 했어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peace-maker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평화를 소개해야지요. 복수를 꿈꾸던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 사이에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됨의 평화를 이루신 것처럼, 갈등과 반목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역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처럼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제하는 공동체 속에서 평화는 어디 있습니까? 또 우리 각 개인의 삶을 중심으로 평화는 온전히 유지되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에서의 평화는 어떻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는 깨뜨려지지 않고 온전합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남을 희생시키고 내 주장을 관철시켜서 평화를 빼앗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양보하고 내가 희생함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자녀와의 사이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남편 또는 아내와의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다른 데 가서 peace-maker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단에 예물을 놔두고라도 먼저 가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평화를 만드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