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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 속에서 완성되는 천국 (마 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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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영화를 볼 때 사람을 분류하는 방법은 나쁜 놈과 착한 놈이잖아요? 그리고 착한 사람이 나쁜 놈을 물리쳐야 영화가 끝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결말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문학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선행을 장려하고 악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아야 우리 사회가 행복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도덕의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법의 역할도 마찬가지지요. 공권력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악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경찰차를 만나면 어떻던가요? 괜히 덜컥 겁이 나지요? 왜냐하면 경찰은 잘못한 사람을 잡아내기 때문에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말씀하기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했어요 (롬 13:1-3). 왜냐하면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내가 악한 일을 했다면 공권력이 나에게 벌을 내리기 때문에 공권력을 행사하는 관원들이 두려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한 일을 했다면 관원들이 두려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여러 가지 제도와 체제가 한 뜻으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계하려고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선행이 증가하고 악이 사라졌나요? 과거와 비교해서 현재의 사회에는 악이 줄어들었습니까, 아니면 더 많아졌습니까?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가 의로움이라면, 이 세상에서 의인이 칭송을 받아야겠지요. 그러나 세상이 과연 의인을 용납하던가요? 인류 최초로 죽임을 당했던 아벨이 왜 죽었습니까? 그가 죽음을 당했던 이유는 그가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의인 노아는 칭송이 아니라 미친 영감이라는 놀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죄악이 관영한 소돔 성에 살면서 그 성의 죄악에 동화되지 않고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가 칭송을 받았던가요? 오히려 욕을 얻어먹고 왕따를 당했어요. 이처럼 의롭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 핍박을 받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인류가 지향하는 것이 의라는 가치이고, 그래서 인간의 모든 제도가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던 것이지요.

이 세상이 의를 추구하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의인이 핍박을 받는 세상이라는 이중적인 구조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의인의 존재양식은 칭송이 아니라 핍박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핍박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온 생애를 핍박 속에서 살았던 바울 역시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세계는 평화가 부재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 하고,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화평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의와 공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핍박하는 세력이지요.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평화를 만들며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벌써 의인이라는 뜻이잖아요? 맨 처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지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속에 아무런 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퍼서 애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온유할 수밖에 없었고, 그 부족한 의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벌써 의인이 되어 있어요. 의를 위해서, 그 의를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당하고 희생을 당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보다도 이 사람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데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의인이 되었을까요? 아무런 의가 없어서 슬피 울어야 했던 사람이 그동안 도를 닦아서 의인이 되었을까요?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면서 선행을 많이 해서 의인이 되었을까요? 여기서 막연히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고 하면 의의 개념을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의인이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맨 처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의가 없다는 것이 왜 슬픈 일일까요? 의롭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가 없어서 애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의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의가 될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가 의의 개념을 생각하면 우선 선한 마음과 행실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러나 믿음이 의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되었거든요. 하나님께서 늙도록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브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그랬더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어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의를 이루는 방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지요. 그래서 율법을 다 지키면 거룩하게 되어 의에 이르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유대인들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바꾸어가지고 자기들은 율법을 다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지요.

그래서 율법의 의 대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 연합하여 그분이 이루신 의를 옷입으면 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된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고, 지금 누구에게 천국을 주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분에게 끝까지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킨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그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해공작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 옷 입은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벧전 5:8)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서 병도 낫고 부자도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그런 약속 하신 적이 없거든요. 오히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예수 믿을 때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핍박을 당하는 것이 결코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잘못해서 고생하는 것을 가지고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고 기뻐해서는 곤란하겠지요.

예수님은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살펴본 천국에 합당한 사람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온전히 심령이 가난해지고 온전히 온유해진 다음에야 천국을 주신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그 천국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고난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할 만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날마다 성장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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