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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간음 (마 0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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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기독교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의 거룩한 성품과 영성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가난을 자처하면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삶은 참으로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추운 겨울밤에 프란체스코가 눈밭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뒹굴면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그의 제자들이 놀라 뛰어나왔겠지요? 그의 제자들에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가 없었소.” 성인이라고 추앙되는 이 사람 역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마음의 간음은 앞에서 말씀하신 마음의 살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는 것, 또는 마음의 간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길을 가다가 예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남자는 당연히 한번이라도 더 쳐다보게 됩니다. 또 이 시대의 비즈니스 세계가 채택하고 있는 매우 효과적인 상술이 미인계입니다. 자동차를 파는 데도 늘씬한 여자가 나오고, 학교에서 학생들 모집하는 데도 예쁜 여자가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를 가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극적인 유혹이지요. 그렇다면 지나가는 예쁜 여자를 한 번 더 쳐다본 것이나 아주 선정적인 광고나 포스터를 바라보는 것까지 마음의 간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에게 있는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본적인 욕구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과거에는 이 욕망이 죄악시되는 수가 많았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수많은 간음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공공연한 영역에서는 도덕이라는 사회적 장치에 의해 이것이 통제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중세시대에 정조대라는 것이 있었잖아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비인간적인 사회적 소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제도 자체도 악할뿐더러 그 동기도 대단히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적 욕망이나 그로 인한 행위가 허용된 범주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사회의 가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의 성적 욕구를 더욱 드러내도록 부추기는 세상입니다. 원시사회 빼놓고 지금처럼 우리의 옷차림에 노출이 심하던 때가 있었던가요? 제가 청년이었을 때만 해도 여자한테 섹시하다고 했다가는 뺨을 맞아야 했을 터인데, 지금은 섹시하다는 것이 최고의 칭찬이 되었습니다. 특히 매스미디어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강렬한 자극들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는데, 우리는 간음을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마음의 간음을 범하지 않고 살 수가 있겠어요? 마음의 간음을 방지하고 못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마음의 간음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심지어는 강요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한 사회의 도덕률이 무너지고 전반적으로 타락이 진행되다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이 극단적인 폭력과 섹스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절정이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습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즉 폭력과 섹스의 타락 정도는 그 사회의 위험수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위험수위는 장난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사회를 탓하고 우리의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옆에서 꼬드기고 유혹을 했을망정 그 간음을 범한 당사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망정 하와는 그 유혹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담 역시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유혹이 없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중세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배꼽티나 미니스커트 같은 노출된 의상도 없었고 간음을 부추기는 미디어나 비즈니스도 없었기 때문에 프란체스코가 성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프란체스코가 오늘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그도 우리와 똑같이 되었을까요?

유혹이 있다고 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고, 사회적 제재가 강하게 시행된다고 해서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정조대라는 비인간적인 기구로 상징되는 엄격한 중세시대였지만,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정조대 열쇠를 몰래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재가 강화되면 그것을 피해 빠져나가는 방법도 더욱 발전되는 것이 우리가 늘 보는 일이잖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현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율법이 얼마나 서슬 퍼렇게 시행되고 있었습니까? 간음하다가 잡힌 사람은 현장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간음죄를 짓지 않았을까요? 물론 물리적인 간음행위가 쉽게 행해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러브호텔이 많지 않았고 교통이나 통신도 발달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마음의 간음은 율법과 도덕의 시행과는 전혀 별개로 얼마든지 행해질 수가 있었고, 주님은 물리적인 간음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물리적인 간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간음을 범한 것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했습니다. 물리적인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앞세우며 속마음을 감추고 의로운 체하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성인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유혹이 적었던 중세시대에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죄악과 부끄러운 모습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의 살인이나 마음의 간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즐기는 사람과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과 프란체스코의 차이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받는 사람과 성인이라고 추앙을 받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죄악의 근원이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주님은 차라리 그 부분을 찍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것이 눈이거나 손이라면 차라리 빼어 내버리고 찍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악을 범해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 내재된 죄악된 성품과 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적당한 상식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존경하고 우리 삶의 표상으로 삶을 만한 사도 바울조차도 어떻게 말했는가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사도 바울이 그렇게 탄식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어야 할까요? 프란체스코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던 문제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가슴을 찢으며 살아야 마땅합니까?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죄악된 성품에 대하여 날마다 죽지 않으면 마음의 살인, 마음의 간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죽습니까?

모세의 율법에서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신 24:1)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혼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지하고 그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사, 서기관들은 이혼증서만 써 주면 얼마든지 이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시행해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에 반하는 일입니까? 그러면서 이혼증서를 써 주었으니까 아내를 내어버린 것도 정당한 일이고, 물리적인 간음을 행하지 않았으니까, 혹은 했어도 들키지 않았으니까 율법을 범한 일이 없는 거룩한 사람 행세를 했단 말이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요?

예수님의 분노를 초래한 것은 율법의 규정을 교묘하게 변경하고 왜곡되게 해석하면서 마음껏 간음을 행하는 당시의 풍조였습니다. 즉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으로 자신들의 간음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겁한 짓이지요. 잘못을 했으면 고개를 떨구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기능이란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생각을 그 율법에 비추어서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비뚤어진 우리의 마음에 맞춰놓고 그래서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중의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마음 속의 간음이라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안 했다고, 주님이 언제 보셨냐고 부인하고 따질 성질의 일이 아니지요. 사실이니까요. 또 이 세상이 간음을 권하는 세상이라고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그 정도를 가지고 무슨 죄가 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논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해석하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눈을 빼어 내버리고 손을 찍어 내버리는 심정으로 슬퍼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것뿐입니다. 그러할 때 주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애통하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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