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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수는 짧고 용서는 길다 (마 0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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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의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복수입니다. 무협영화나 서부영화의 내용은 주로 복수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악당들에게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이 수많은 난관을 겪고 고된 훈련을 마친 후 악당들을 쳐부수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다는 줄거리, 우리가 자주 보는 레퍼토리입니다.

주인공이 악당들을 물리치고 통쾌하게 복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시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억울하게 당한 약자가 강자를 물리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복수의 테마는 궁극적으로 악인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필귀정의 가치와 결합되어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또 어쩌면 우리 자신이 그 복수의 스토리 속에 몰입되어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복수하려는 사람에게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공감대의 형성입니다. 사회적인 악의 제거라는 측면에서도 사람들은 복수하는 사람을 응원하게 됩니다. 또 개인이 당한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동정심에 의해서도 복수는 정당성을 인정받습니다.

이처럼 복수는 독자나 관객에게 감동이나 쾌감을 주기 때문에 매우 인기 있는 주제가 됩니다. 요즘 복수 시리즈 영화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15년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넣어주는 군만두만 먹으며 복수를 위해 이를 가는 오대수의 이야기 ‘올드보이’가 세계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어린이를 유괴해서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1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는 금자씨는 그동안 자기를 교화하려고 교도소에 찾아오던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금자씨의 복수 이야기는 따로 있지만, 살인범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금자씨가 살인범의 하수인이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행색으로 사는 전도사에게 날리는 “너나 잘하세요.” 이 한 마디 역시 통쾌한 복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일견 이러한 우리의 인지상정을 잘 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났을 경우의 규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 21:22-25).

보복법이라고 이해되는 이 법은 매우 타당성 있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복수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과 용서의 정신에서 먼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얼핏 들으면 예수께서 옛 율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사회적 악을 응징하고 개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것이라지만, 결국 복수라는 또 다른 폭력과 악을 허용하는 수준 낮은 보복법을 폐지하시고 사랑과 용서에 근거한 더 수준 높은 계명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러나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소위 보복법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복법이라고 잘못 알려진 이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 더욱이 보복을 보장하는 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또 그 폭력은 점점 증가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한 명이 라이벌 폭력배 집단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맞은 쪽에서 각목을 들고 떼거리로 몰려가서 라이벌 집단의 깡패 몇 명 갈비뼈를 부서뜨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예상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칼부림이 일어나고 한두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면전이 벌어지겠지요. 이처럼 폭력은 결코 더 작은 폭력에 의해 만족되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법칙은 바로 이러한 과잉보복을 금지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은 사람은 한 대 때려서 보복하라는 보복법이 아니라, 한 대 맞은 사람이 두 대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법칙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이 법은 한 대 맞은 사람에게 때린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법이 아닙니다. 개인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을 찾아가서 그 분쟁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닭 한 마리의 손실이 생겼을 경우 재판관은 이 법칙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닭 한 마리로 보상하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힘없는 사람이 닭 한 마리 빼앗기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이 그대로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닭 한 마리 손실이 생겼는데 힘 있는 자가 와서 닭 대신 소 한 마리를 뺏어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 법입니까? 그러니까 이 법은 보복을 용납하고 폭력을 부추기는 악법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법이 그 당시에 보복법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이 법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당한 일에 개인적으로 그만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았으면 꼭 한 대를 때려야 하는 것이 율법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딱딱하고 인정머리 없는 법이 아니에요. 고아와 과부를 배려하고 나그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 얼마나 많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선하고 거룩한 법입니다.

내가 닭 한 마리를 잃어버렸어도 상대방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서 배상시키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못할 일을 당했어도 그것 가지고 재판정에 가기보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려는 것이 율법을 올바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선생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선한 율법을 악한 법으로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단 말이지요.

이제 주님께서는 참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치도록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뺨 한 대 맞았으면 나도 상대방 뺨을 한 대 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고소해가지고 속옷을 빼앗아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십니다. 또 억지로 5리를 같이 가게 하면 10리라도 같이 가 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체에 관한 손상이나 재산상의 손해, 또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 즉 모든 피해와 손해에 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겠다고 싸우기보다 양보하고 차라리 손해를 보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또 나쁜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도둑을 맞는다거나 이렇게 피해를 입을 때도 많아요. 그럴 때면 우리는 자연히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복수를 해야 속에 응어리진 한이 풀릴 것 같지요. 또 복수해야 할 대상은 그렇게 악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자녀들 많습니다.

그러나 복수라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는 파괴행위일 뿐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범에게 살해된 아이들의 부모를 불러 모아 살인범을 죽이게 합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슬픔은 살인범을 살해하는 잔인한 새로운 범죄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인범을 살해해도 이미 죽어버린 아이들은 살아오지 않고, 그 부모들만 살인범이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들은 복수를 했다는 쾌감보다 살인을 했다는 부담 속에 평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수가 갖는 한계입니다.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무력감이나 피해의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식의 피해자로 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수를 포기함으로써 용서와 사랑을 실천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복수를 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가치가 훼손된 것은 어떻게 하지요? 복수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사도 바울 역시 복수는 하나님의 비즈니스라고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복수를 하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감동받고 변화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더 이용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죄로 도대체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밸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밸도 없이 살아라. 사실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온갖 능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바보처럼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와 규범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가치와 규범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와 대립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우리가 당했던 모욕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찬란한 영광과 풍성한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그리스도인,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솔직히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저는 혹시 여러분 중에 복수를 꿈꾸는 분이 계실까 염려됩니다. 과거에 억울하게 당한 일을 복수하지 못해서 아직까지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사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미움과 분노가 아직도 여러분의 영혼을 찌르고 아프게 합니까? 아무리 잊으려 해도 고통의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 주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수는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복수의 망령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차라리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십시오.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기를 찌른 자들의 용서를 기원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복수는 허망하지만, 용서와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복수로는 승리할 수 없지만, 용서로써 우리는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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