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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과 원수의 경계 (마 0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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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약이 십계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신앙의 실천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십계명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겨야 할 것인지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충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우리 이웃에 대한 규범들로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런 계명들은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그런 계명들은 자동으로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이웃의 집에 가서 도적질을 할 수 있습니까?

도적질하지 말라거나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고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의 살인은 비록 살인행위가 구체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살인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십니다. 마음 속의 간음 역시 실제로 발생한 간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항을 실천하기에 앞서 마음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행위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된다면 모든 율법의 계명들을 다 수행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그 만큼, 그 부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했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의미는 대단히 심오하고 막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어떻게 가르쳐지고 있었는지, 어떻게 시행되고 있었는지 보세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웃을 사랑하라고는 했지만 원수를 미워하라고는 누가 그랬습니까? 율법 어디에서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이웃 사랑하라는 계명을 매우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이웃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과는 큰 차이가 있겠지요? 그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자식을 이웃의 범주에 넣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이러면서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연인을 이웃이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기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훌륭한 이웃사랑 아닙니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친구를 이웃이라고 친다면, 어찌 그런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 가게에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을 이웃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훌륭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 대신에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굳이 사랑할 필요나 이유도 없습니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의 사정을 보고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혹은 괜히 나섰다가 나까지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고 생각되면 나서지 않게 됩니다. 만일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이웃의 범주에 들어 있다면 발 벗고 나설 것입니다.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의 차이가 우리의 행위를 좌우하고 우리의 사랑을 좌우합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한 옷차림의 노숙자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폭력과 비행을 일삼는 불량 청소년들도 우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의 이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입니까? 왜 거지는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까? 왜 친한 친구는 이웃이 됩니까? 이웃의 경계는 누가 정합니까? 내가 좋아하면 이웃이 되고, 좋아하지 않으면 이웃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웃을 매우 잘 사랑할 수 있게 되겠군요.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켰고 매우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들의 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말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웃인가 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웃을 대단히 좁은 범주로 한정시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왜곡시킨 것이 당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렇게 배웠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이웃을 정의하고 이웃과 비이웃의 경계를 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와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께서 해 주신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끝내고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그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 즉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비를 베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아니오, 그 반대예요.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즉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했던 일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음에 이른 사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버려진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즉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나에게 이익될 것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웃이라는 개념에 혼란이 생깁니다. 아까는 이웃이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강도 만나 죽음에 내버려진 사람이 이웃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은 양쪽이 다 이웃인 것이지, 한 편만 이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인가 사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그를 우리의 이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 나에게 유익한 친구가 이웃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버림받은 사람들, 아름다운 것이 없는 사람들 역시 우리의 이웃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닌 거예요. 그것은 오히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사랑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확대해석해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던 율법사들의 가르침은 결국 그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결코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4-5).

원수가 잘못 되는 것을 보고 ‘잘 됐다, 고소하다.’ 이렇게 생각하다가는 주님께 책망을 듣겠지요?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그저 늘 들어왔던 말씀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대단히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원수의 길 잃은 소를 돌려주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고 피해를 입히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까지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 살다 보면 사람 사이에 원수지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평생 일해서 번 돈을 사기당해서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신 분도 있고, 믿고 사랑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주었는데 더 좋은 사람 만났다고 그 사랑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 피해와 상처를 남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분노와 슬픔이 차올라서 차라리 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나 나오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야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겠지만, 글쎄 그게 시늉내는 일이라도 쉽습니까? 그런데 주님 말씀 보세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그렇지요,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상급을 기대한다면 상 받을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천국에서 상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다면 그 믿음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의 다름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정말 못된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런 사람들도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햇볕과 비를 똑같이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직까지 참으시고 은총을 베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왕이 은총을 베푸는 사람에게 부하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왕의 은총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이 아직 은총을 베풀고 계시다면 우리로서는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가 아직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미움과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지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 되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원수까지 사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원수의 경계가 무너지고, 원수가 이웃의 범주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이웃사랑이라는 율법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벌을 내린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사랑으로 율법은 실천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고 우리 인간을 바꾸어 놓을 말씀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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